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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이나 걸린 미국 헌법 비준 - 국민의 기본권 보장 없어 논란 계속


미국 초기의 지도자 그룹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여 13개 주를 느슨한 동맹체로 묶어놓고 있던 연방 조항을 수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전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해 9월 17일, 대표들은 4개월 동안의 격렬한 논쟁과 진지한 토의끝에 최종 작성된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13개주 가운데 적어도 9개주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회의에 모인 대표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고 제출된 안건들을 토의할수도 있었고, 마음을 바꿀수도 있었습니다. 이제 대표들은 마음대로 공개적인 발언을 할수 있게 됐습니다. 이들에게는 새 헌법의 문서가 주어졌습니다. 신문들도 이 문서를 입수했습니다. 따라서 신문들은 한자도 빼지않고 이를 보도했습니다.

일반 대중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여론은 대표들이 회의에서 보여준 것 못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법이 합중국을 유지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헌법이 독재자를 등장시킬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헌법을 지지했던 대표들은 이 문서가 비준을 받으려면 공개적인 발언을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을 신속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문서가 서명된지 한 두 주일후부터 대표들은 헌법을 지지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글은 뉴욕에 있는 신문들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신문은 연방주의 신문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들 신문은 Publius 라는 이름아래 출판됐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 신문은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그리고 죤 제이등 세사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여러해가 지난후 역사가들은 연방주의 신문들이 헌법에 대한 가장 우수한 글을 실은 신문들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1787년, 이들 신문은 별로 큰 영향력을 갖지못했습니다.

헌법에 대한 여론은 미국인들을 두 그룹으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헌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연방주의자 즉 Federalist로 불리웠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 연방 주의자 즉 Anti-Federalist로 불리웠습니다. Anti-Federalist라고해서 이들이 반 아메리칸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미국을 사랑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중에는 주 지사, 독립 전쟁의 영웅들이 있었으며, 나중에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 체제에 회의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통령, 의회, 법원등에 너무 많은 권한을 주면 국민들은 더 이상 자유민이 될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것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 연방주의자 중에 버지니아의 패트릭 헨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그를 헌법에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불렀습니다. 패트릭 헨리를 비롯한 반 연방주의자 들은 새로운 정부 구성안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감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농촌 주민은 도시민에게, 북부인은 남부인에게, 작은 주는 큰주에게 반대하도록 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반 연방주의 신문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은 펜실바니아에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정부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정부가 새로운 헌법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불과 몇 사람, 이름이 잘 알려진 몇사람이 여러분을 구속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어떤 연방주의자는 국민을 교육시키기 보다는 두렵게 하는 일이 훨씬 쉽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대륙 회의에도 연방주의자와 반 연방주의자가 있었습니다. 이 회의는 별다른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이것이 13개주를 묶어 놓은 유일한 장치였습니다. 이 회의는 뉴욕 시에서 열렸습니다. 필라델피아 제헌 회의는 대륙회의에도 새 헌법을 한부 보냈습니다. 대륙회의는 8일내에 각주는 비준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연다는데 동의했습니다. 각 주는 하나 하나씩 회의를 열었습니다.

맨 처음 헌법을 비준한 주는 델라웨어 주로, 비준일은 1787년 12월 이었습니다. 회의 참석자 전원이 이를 찬성했습니다. 다음은 펜실바니아로 역시 12월이었습니다. 같은 12월에 뉴져지도 헌법을 비준했고, 이어 죠지아, 코네티컷트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연방 주의자들에게는 이제 4개주만 더 찬성을 하면 헌법이 비준될 수 있게 됐습니다. 매사츄셋즈는 2월초이 이를 표결에 부쳤습니다. 대의원들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을 헌법에 첨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그같은 보장이 추가되면 비준을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메릴랜드는 4월말에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여러 대의원들이 표결과 함께 자기들의 항의문을 첨부했습니다. 이들은 새 정부 구성안이 수정되지 않으면 국민의 자유와 행복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5월 말경에 8번째로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이제 한주만 더 비준하면 새 헌법은 미국 최고의 법으로 확정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눈은 버지니아로 쏠렸습니다.

버지니아는 13개주 중에서 가장 큰 주였습니다. 버지니아의 서쪽 경계는 멀리 미시시피 강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버지니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비준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중에는 제임스 매디슨, 패트릭 헨리, 죠지 메이슨, 제임스 몬로, 에드먼드 랜돌프, 죤 마샬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쟁쟁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여전히 미국 대표로 프랑스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모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서신을 통해 헌법의 대부분을 찬성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 권리를 선포한 내용이 없는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버지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죠지 워싱턴은 마운트 버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7월 내내 사람들은 그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고 또 그의 멧세지를 회의장에 전달했습니다.

버지니아 대의원들은 3주 동안이나 헌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6월말이 되자 대의원들은 드디어 표결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반 연방주의자이며 강력한 발언자인 패트릭 헨리는 마지막 발언을 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이 회의가 헌법을 비준한다면, 나는 패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좋은 목적을 위해 투쟁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기다리면서 희망을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미국 혁명의 정신이 상실되지 않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나는 이 새로운 정부 계획이 미국 국민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보호하도록 고쳐지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

드디어 회의는 표결에 들어갔습니다. 버지니아는 헌법을 비준했습니다. 그러나 마사츄셋즈주와 같이 국민들의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버지니아의 연방주의자들은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헌법의 확정에 필요한 9개주를 채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뉴 헴프셔가 며칠 앞서 이를 비준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버지니아는 헌법을 비준한 10번째주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주, 즉 노스 캐롤라이나, 로드 아일랜드, 그리고 뉴욕주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뉴욕은 가장 중요한 주였습니다. 만약 뉴욕이 헌법을 비준하기 거부한다면 중앙 정부는 국가를 통치할수 없게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되면 다른 12개주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지고, 뉴욕을 중심으로 동서로 분리될수 있었습니다.

연방주의자들은 알렉산더 해밀턴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이들은 표결을 지연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이 연속으로 의사 진행 발언을 계속했습니다. 이들은 버지니아에서 어떻게 됐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월초 이들은 버지니아의 승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반 연방 주의자들은 그로부터 3주나 더 끈질긴 반대 투쟁을 벌였습니다. 7월말에 가서야 뉴욕도 겨우 헌법을 비준할수 있었습니다. 표결은 30대 27로 아주 근소한 차이였습니다. 마사츄셋즈,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뉴욕도 헌법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강력한 중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오랜 투쟁은 끝났습니다. 헌법을 작성하는데만 4개월이 걸렸습니다. 이를 비준하는데는 10개월이 걸렸습니다. 대륙 회의는 헌법이 1789년 3월 첫번째 수요일부터 효력을 발생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와 로드 아일랜드는 그로부터 여러달이 지난후까지도 헌법을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펜실바니아의 벤자민 러쉬는 헌법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우리는 국가가 되었다, “ It is done. We have become a nation”이라는 여덟개 단어로 감격을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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