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회의는 중앙 정부의 의회를 상원과 하원으로 나누고 하원 의원은 인구 비례로, 상원 의원은 각주마다 동등한 수로 선출한다는데 합의했습니다. 대 타협(Great Compromise)으로 불리우는 이 합의를 모든 대표들이 좋아한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회의를 무산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원의원 수를 결정하는데는 중요한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원들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예 문제였습니다. 만약 하원 의원수를 인구 비례로 정한다면 인구 조사에 계산되는 사람은 누구로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즉 노예도 주민의 수에 계산해야 하는가가 문제였습니다. 1787년에는 미국에 이미 수만명의 노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남부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물론 북쪽에도 다수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선박업주들은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실어와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연방 조항은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 제도를 인정하고 안하고는 각 주가 결정할 문제였습니다. 예를들어 매사츄셋즈 주에서는 노예 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9개 주는 새로이 노예를 들여오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죠지아, 노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3개주만 계속 노예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도 대부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죠지 워싱턴, 제임스 매디슨등도 포함됐습니다. 누구도 이들에게 모욕감을 주기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헌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 했습니다. 노예는 통상법, 세금법은 물론, 의회의 대표 선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토론중 어떤 대표들은 노예는 재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대표자를 뽑기위한 인구수에 노예는 포함될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예도 사람이기때문에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구수에 계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펜실바니아의 구베니어 모리스는 분개한 어조로 발언했습니다. “노예는 악의 제도입니다. 노예 제도는 이를 허용하는 모든 주에 슬픔과 빈곤을 야기시켰습니다. ” 그러나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챨스 핀크니 대표는 미국의 노예 제도를 옹호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통해 모든 인류의 절반은 노예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버지니아의 죠지 메이슨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원했습니다. 버지니아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당시 노예 해방을 시도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이를 방해했다고 메이슨은 말했습니다. 그는 노예 제도로부터 돈을 번 영국 상인들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다른 대표들도 각각 일어나 노예 제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헌회의는 그 제도가 자 잘못에 대해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었습니다. 대표들은 또 노예 제도를 금지시키는 헌법을 만들려했다가는 제헌회의가 결렬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남부의 주들이 그러한 헌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이들은 합중국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매사츄셋즈의 러퍼스 킹 대표는 제헌회의에서는 노예 문제를 정치적 차원에서만 다루자고 제안했습니다. 결국 그대로 진행이 됐고, 여러가지 타협안들이 나왔습니다. 예를들어 펜실바니아의 제임스 윌슨 대표는 각주의 대표 선출을 위한 인구 계산 방식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안에 따르면 모든 백인과 그외 모든 자유인은 한사람에 한명씩으로 계산하고 노예는 5명을 3명으로 계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헌 회의는 3-5제라 부르는 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헌법에서는 노예, 즉 slav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다른 모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all other people로 표기했 습니다. 3-5제는 14차 수정조항이 통과된 1868년까지 존속됐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3-5제는 필요했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합중국이 구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노예제도는 중앙 의회의 권한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역시 문제가 됐습니다. 다시한번 똑같은 질문이 대두됐습니다. 노예도 국민인가? 아니면 재산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수입세, 새 주의 성장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수 있었습니다. 이들 문제에 대해서도 제헌회의는 여러가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회의는 노예 한명당 10달라의 수입세를 연방 재무부가 거둘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1809년까지는 계속 노예를 수입할수 있도록 하고 그 다음해 부터는 새 노예를 들여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때까지 각주는 노예 문제에 대해 별도로 결정을 내릴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1808년 이후에는 중앙 정부가 이에 관한 결정을 내리도록 됐습니다. 새로운 헌법에 대한 토의가 1787년 여름 내내 계속되면서 일부 대표들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헌법이 작성되면 누가 그것을 승인하고 비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주 의회가 할것인가, 아니면 국민이 할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구베니어 모리스가 제의한대로 대규모 회의를 열어 거기에서 할것인가. 언제나 처럼 엘브릿지 게리는 국민에게 그같은 권한을 준다는데 반대했습니다. 그는 일반 국민이란 세계에서 가장 괴상한 정부 구성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그같은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국민이 새로운 정부 구성안을 비준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매디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입법 기구에만 기반을 둔 체제와 국민에 기반을 둔 체제와의 차이는, 하나의 조약과 하나의 헌법과의 차이와 같습니다.” 버지니아주 대표 에드몬드 랜돌프는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준비된 문서를 주 회의에서 검토하자고 제의했 습니다. 그리고 주 회의는 여기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전국 총회를 열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자고 말했습니다. 구베니어 모리스도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구성하도록 견고히 하기 위한또 다른 회의를 열것을 오랫동안 희망해왔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온것이 사실입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 안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또 다른 회의를 소집한다는 것은 필라델피아 회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지금까지 기울여온 노력과 모든 희망이 종말을 고하는 것임을 의미했습니다. 이같은 토의를 거쳐 대표들은 각 주별로 개최한 회의를 통해 국민이 비준을 하도록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대표들은 헌법을 비준하는데 몇표가 필요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연방조항의 어떤 내용이든 수정하는데 13개주 전체가 동의해야만 가능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회의는 그 조항을 바꾸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3개주 모두가 동의해야만 제헌 회의 내용이 현실화될수 있었습니다. 여러 대표들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로드 아일랜드 주 같은 곳에서는 아예 대표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준비된 헌법은 부결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듯이 필라델피아 회의는 연방 조항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들은 전혀 새로운 정부 구성 안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3개주보다 적은 수의 주가 동의해도 승인이 될수 있게 한다면 헌법은 살아날수 있었습니다. 강력한 중안 정부안을 지지했던 대표들은 신속히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숫자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비준을 위해서는 몇개의 주가 필요한가를 논의했습니다. 그날 일과가 다 끝나가도 대표들은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표들은 밤에도 토의를 계속했습니다. 다음날 대표들은 이를 표결에 부쳤습니다. 결국 9개주만 찬성하면 헌법은 인정되도록 결정됐습니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는 이제 마지막 절차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이제 합의된 내용을 모두 최종 문서로 만들어 서명만 하면 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