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부족간 분열로 유럽인 진출 막지못한 인디언들


18세기에 북 아메리카를 장악한 나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등이었습니다. 스페인은 훌로리다를 차지했고, 프랑스는 북부와 중부에서 강세를 유지했습니다. 영국은 동부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세 나라는 북 아메리카에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황의 타결은 전쟁밖에 없었습니다.

강력한 이들 유럽 국가들은 이미 전 세계에서 영토와 돈을 놓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여러 가지의 소규모 전쟁은 거의 백년이나 계속됐습니다. 그러한 전쟁은 윌리암 왕의 전쟁, 앤 여왕 전쟁, 죠지 국왕의 전쟁, 프랑스 인디언 전쟁등으로 불리웠습니다.

프랑스와 인디언의 전쟁으로 불리우는 French and India War는 실제로는 영국과 프랑스중 누가 북 아메리카에서 강자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전쟁에는 프랑스와 그 식민지,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인디언 부족들이 한편이고 영국과 영국 식민지, 그리고 영국에 우호적인 인디언 부족들이 한편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시작됐습니다. 5대호 지역과 오하이오 강, 미시시피강 주변을 처음으로 조사한 유럽인들은 프랑스 탐험가들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상인들과 사냥꾼들을 이들 지역으로 보냈고, 여러 군데에 교역 센터를 세웠습니다.

영국도 같은 지역을 자기들의 관할 지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왕이 어떤 사람에게 북 아메리카의 땅을 주면 그것은 동부에서부터 서부 끝까지를 의미했습니다. 서부의 끝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게들 간주했습니다. 동부 해안 지대는 이미 사람이 너무 많았고 정착민들은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사냥터를 훼손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자기들의 땅을 더 이상 활용할수 없는 상황이 올수도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서로 뭉치기만 했으면, 백인들이 서부로 이동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디언 종족들의 갈등은 그들을 분열시켰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싸우기 시작하자 어떤 인디언은 영국편을 들었고 어떤 인디언은 프랑스 편을 들었습니다.

프랑스 정착민들은 대부분 오늘날 카나다의 일부가 돼있는 이른바 뉴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의 생활은 남쪽 영국 정착민들의 삶과 크게 달랐습니다. 예를들면 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프랑스 국교인 로마 카톨릭을 신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인 개신교도들은 영국 식민지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이 인디언들로부터 높은 값을 지불하고 동물 가죽을 사는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땅보다는 가죽 거래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국은 인디언들로부터 가죽을 사들임으로써 프랑스 상인들의 사업을 방해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오늘날의 펜실바니아주 핏즈버그에 교역 거점을 설치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포트 두케인(Fort Duquesne)이라고 불렀습니다. 영국은 이 장소가 버지니아에 속한 곳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754년 버지니아 주 지사는 죠지 워싱턴이라는 27세의 식민지 출신 젊은이를 그곳에 보내 프랑스인들에게 물러 나라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죠지 워싱턴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포트 두케인에서 떠나기를 거부했습니다. 죠지 워싱턴과 함께간 150명의 병력은 프랑스인들을 공격해 그중 10명을 숨지게 했습니다. 프렌취-인디언 전쟁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포트 두케인에서 워싱턴에 합류했습니다. 브래독은 유럽식으로 싸우려고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넓은 공간에서 군인들이 줄을 지어 총을 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프랑스인들과 인디언들은 그렇게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잘 띄지 않은 옷을 입고 숲속에 은신했습니다. 그들은 나무 뒤에서 영국 군을 행해 총을 쏘았습니다. 영국군은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포트 두케인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브래독 장군도 이 싸움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렌취-인디언 전쟁의 대부분 전투는 뉴욕과 카나다 국경 사이에 있는 두개의 큰 호수, 즉 죠지호와 챔플린 호 주변에서 발생했습니다. 챔플린 호는 죠지호의 북쪽에 있었으며, 거의 카나다의 몬트리올까지 연결됐습니다.

이들 호수는 프렌취-인디언 전쟁 기간중 군인과 보급 물자를 실어나르는 최선의 통로를 제공했습니다. 당시에 북 아메리카에는 길이라곤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강과 호수를 지배하는 자는 북 아메리카를 거의 지배할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도시인 퀘벡과 몬트리올에 군 기지를 갖고 있었고 영국은 허드슨 강을 따라 기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 기지의 사이가 가장 치열한 싸움터였습니다. 1755년 마지막 몇달동안 죠지 호 부근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패배한 다음부터 전투는 격화됐습니다. 그러자 프랑스는 챔플린호와 그 주변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요새로 불리우는 강력한 프랑스 군 기지는 챔플린호 남쪽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기지의 이름을 카리요운(Carillon) 요새라고 불렀습니다. 이 요새는 챔플린호를 장악하고 죠지호 일부의 장악에 필요한 지역까지 차지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이 요새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견고하게 버틸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수 미터 사이를 두고 두개의 대형 통나무 벽을 세웠습니다. 목책 사이는 흙으로 채웠습니다. 나중에는 전면을 튼튼한 돌담으로 보강했습니다. 목책 안의 군인들은 잘 보호됐습니다. 영국군도 죠지호 남쪽에 이와 비슷한 윌리암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를 세웠습니다.

프랑스는 아메리카의 프랑스군을 지휘하도록 국내 최고의 지휘관을 파견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키스 드 몽캄(Marquis de Montcalm)이었습니다. 몽캄 장군은 1757분 여러 영국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윌리암 헨리 요새였습니다. 영국군 지휘관은 항복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몽캄 장군은 영국군이 항복하면 예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 편에서 싸운 인디언들은 그같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은 영국군 포로와 정착민들을 살해했습니다. 몇명이 죽었는지는 아직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시 사망자는 천명이 넘었을 수도 있습니다.

1758년 한 강력한 영국군 부대가 챔플린 호의 카리요운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 지휘관은 몽캄 장군이었습니다. 카리요운 요새는 병력수가 많은 영국군을 방어하기 충분할 정도로 견고했습니다. 공격했던 영국군은 일단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번에는 제프리 아머스트(Jeffery Amhurst) 장군이 영국군을 지휘했습니다.

아머스트 장군은 이번에는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영국군은 이 기지의 이름을 티콘데로가(Ticonderoga)로 바꾸었습니다. 이곳은 프렌취-인디언 전쟁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이 기지는 그후 미국의 독립 전쟁에서도 중요한 장소가 됐습니다.

프렌취-인디언 전쟁은 영국이 퀘벡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다음 끝이 났습니다. 1763년 영국과 프랑스는 파리에서 전쟁을 끝내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영국은 과거 프랑스가 차지했던 땅을 모두 관할하게 됐습니다.

영국은 이제 미국의 동해안에서부터 미시시피강 사이의 넓은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됐습니다. 미시시피 강 서부는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의 진출을 막기 위해 그들이 관할하던 서부의 땅을 모두 스페인에게 인계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스페인의 텍사스와 뉴 멕시코 식민지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인디언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프렌취 인디언 전쟁에서 사용된 요새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당초에 세워진 시설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그때의 설계를 바탕으로 다시 세운 요새입니다. 이 두 요새의 주변은 죠지 호와 챔플린 호가 있어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휴가철이면 이 지역에서 야영을 하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미국의 사적지로 지정된 사라토가(Saratoga)도 있습니다.

죠지 비취 주립 공원(George Beach State Park)도 빼놓을수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250여년이 지난 오늘날, 그때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다는 점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