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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만화 피너츠를 창조한 찰스 먼로 슐츠


찰스 먼로 슐츠.
찰스 먼로 슐츠.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세계의 사랑을 받는 만화 피너츠를 창조한 찰스 먼로 슐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세계의 사랑을 받는 만화 피너츠를 창조한 찰스 먼로 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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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먼로 슐츠는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만화 ‘피너츠(Peanuts)’를 그린 만화가입니다. 찰스 슐츠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카투니스트(cartoonist)’, 즉 신문 연재 만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피너츠’는 찰리 브라운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다른 어린이들과 강아지가 고정적으로 등장해 그날그날 벌어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만화 ‘피너츠’는 그가 타계한 2000년도 기준 세계 75개국 2천600여 개 신문과 잡지에 실리고 있었습니다. 독자의 수는 무려 3억 명이 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너츠는 텔레비전 특집으로도 40여 개나 만들어졌고, 영화가 4개, 그리고 뉴욕 브로드웨이에도 데뷔했습니다. 그 외에 책도 여러 가지가 나오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비롯한 각종 카드, 커피 컵과 같은 많은 상품에도 피너츠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강아지가 펼치는 익살맞고 천진하고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때로는 어른들의 세계를 은근히 비아냥대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핵심입니다.

찰스 슐츠는 1922년 11월 26일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칼은 독일계였고 이발사였습니다. 어머니 디나는 노르웨이 혈통이었습니다. 집안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찰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늘 신문에 실린 스키피(Skippy), 미키마우스(Mickey Mouse), 뽀빠이(Popeye) 등 만화를 함께 보며 즐겼습니다. 찰스 슐츠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베껴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훌륭한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찰스는 고등학교 3학년에 본격적인 그림 공부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는 통신교육으로 응용만화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찰스의 만화 그리기에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과 격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찰스는 1942년 미 육군에 들어가 유럽 전선에 참전하면서 그림 공부는 잠시 중단됐습니다. 그러나 군에서 퇴역하자마자 찰스는 여러 잡지에 유머 만화를 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쉽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신문과 잡지에 계속 만화를 보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슐츠는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작품을 여러 곳에 보냈습니다.

1950년 봄 찰스 슐츠는 ‘유나이티드 피쳐스 신디케이트(United Features Syndicate)’로부터 그의 만화에 관심이 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찰스 슐츠는 새로운 만화 1회 연재분을 그려서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만화 공급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만화가 바로 ‘피너츠’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피너츠’란 말은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찰스 슐츠는 다른 제목을 원했으나 슐츠의 제목은 다른 만화와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급사 측에서 피너츠라고 정해버린 것입니다. 피너츠의 첫 일간 연재분은 1950년 10월 2일 지면에 나왔습니다.

신문에 연재된 찰스 먼로 슐츠의 만화 '피너츠'. 사진제공=Charles M. Schulz Museum and Research Center
신문에 연재된 찰스 먼로 슐츠의 만화 '피너츠'. 사진제공=Charles M. Schulz Museum and Research Center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의 신문사들은 갈수록 교육 수준이 높아가는 독자들에게 맞는 카툰을 원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적이면서, 심각하지 않고, 유머러스한 슐츠의 만화는 새로운 흐름에 잘 들어맞았습니다. 머지않아 피너츠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문 연재만화로 떠올랐습니다. 이 만화는 1955년과 1964년, 우수 만화상인 루벤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피너츠는 4칸짜리 만화 외에 단편 만화영화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이야기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A Charlie Brown Christmas)’입니다. 방송국에서는 음향, 그림의 움직임, 색조 등이 어설퍼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오히려 찰리 브라운의 개성과 작품이 전달하는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이른바 대박이 터졌습니다.

시청자들의 인기 속에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는 에미상과 피바디상 등 방송계 최고의 상들을 받게 됐습니다. 이후‘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는 성탄절 특별 영화의 고전의 반열에 올라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빠지지 않고 방영됐습니다. 슐츠의 만화가 대중문화에 얼마나 커다란 위치를 차지했는가는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표지 인물로 피너츠 주인공들을 꼽은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슐츠는 끝까지 본인이 그림을 직접 그렸을 뿐 아니라 쉬지 않고 일을 한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피너츠 만화가 연재되는 동안 그가 휴가를 간 건 1997년에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75세 생일을 맞아 5주 동안 휴가를 다녀 왔는데, 그때 신문에는 전에 그린 것들이 다시 실렸습니다. 일생 동안 앞서의 만화를 다시 실은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습니다.

1981년 큰 심장 수술을 받고 나중에는 손이 떨리는 증세가 왔어도 슐츠는 여전히 문하생을 두지 않고 직접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1999년에 직장암 진단을 받고는 붓을 놓아야 했습니다. 2000년 2월 12일, 마지막으로 그린 만화가 인쇄돼 나오기 하루 전날, 찰스 슐츠는 캘리포니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그의 만화는 21개 언어로 세계에 퍼져 있었고, 그때까지 그린 네 칸짜리 만화는 1만8천 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사업상으로도 규모가 막대해서 슐츠의 작품으로 인한 사업 수입은 매년 1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찰스 슐츠가 세상을 떠난 후 그에게는 의회 골드메달이 수여됐습니다. 2015년에는 캘리포니아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됐습니다.

그가 간 후 본인이 직접 그린 피너츠는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18년이 지날 때까지 그 인기는 퇴색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창조한 만화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각종 서적, 기념집, 텔레비전 특집, 광고 등에 등장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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