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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3)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3)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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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 여러 나라는 앞다퉈 식민지 개척에 나섰습니다. 카리브 해 섬과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 농장을 건설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다 노예로 부렸는데요. 흑인 노예 무역을 처음 시작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지만 곧 영국이 주도권을 장악했고요. 17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에도 흑인 노예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미국에서 흑인 노예제도가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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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짝처럼 배에 실려 지옥과 같은 중간항해에서 살아남은 아프리카 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 잠시나마 호강을 누릴 수 있었다. 노예선 선장들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값을 받기 위해 상품을 손질했던 것이다. 영양가 있는 음식과 과일 등을 먹여 기운을 차리도록 했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다듬었다. 또 눈에 띄는 결함이 있으면 미리 고쳐줬다.”
(시공사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중에서)

네, 이 같이 노예들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표백’이라고 했는데요. 표백 과정이 끝나면 노예를 판다고 소리치며 다니거나, 전단을 돌려서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한 무리씩 노예들을 묶어서 진열한 뒤 경매에 붙였는데요. 노예들의 나이나 건강상태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졌습니다. 대서양의 흑인 노예무역은 1500년대 초에 이미 시작됐지만 북미 지역에 흑인 노예들이 도착한 것은 1600년대, 17세기에 들어서의 일인데요. 담배 농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앨리슨 교수//
“담배는 미주 대륙 전역에서 재배되는데요. 북미 지역에서 생산되는 담배는 별로 품질이 좋지 않았어요. 카리브 해 섬에서 나는 담배가 더 좋았죠. 그러다가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살던 영국인 이주민들이 남미 오레노크 계곡의 담배 종자를 받아서, 담배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서포크 대학교 역사학과 로버트 앨리슨 교수의 설명을 들으셨는데요. 처음에는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이 담배 농장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앨리슨 교수//
“처음에 영국인들은 담배 농사를 짓기 위해 구할 수 있는 모든 노동력을 다 동원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원주민 인디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원주민 인디언들을 데려다 농장에서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연한 고용계약 노동자라고 해서, 일정 기간 동안 계약을 맺고 온 노동자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보통 가난한 영국인들이 계약노동자로 미국에 와서 일했는데요. 예를 들어 7년 정도 약속한 기간 동안 일을 해주면 계약에서 풀려나고, 50 에이커의 땅을 받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영국에서 건너오는 뱃삯도 농장주인들이 부담했죠. 17세기말까지는 주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 인디언들이나 영국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은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특히 계약 노동자들의 경우, 기후가 다른데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중노동에 시달리니까,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사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좋았습니다. 2년 동안 이미 실컷 부릴 수 있었고, 계약서에 약속했던 땅을 내주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새로 계약을 맺고 데려올 노동자는 얼마든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1650년 이후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계약 노동자들이 차츰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율이 높아진 것입니다.

//앨리슨 교수//
“계약이 끝나 자유의 몸이 된 계약 노동자들이 약속한 땅을 내놓으라고 한 거죠. 1675년에는 연한계약 노동자 출신들이 더 많은 땅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버지니아의 담배농장 주인들이 계약 노동자들보다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선호하게 된 거죠.”

사실 처음 미국 버지니아 주에 온 흑인들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1619년 네덜란드 상선이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는데요. 이 배에는 흑인 19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아프리카에서 바로 왔는지, 카리브 해의 섬에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요. 어디서 왔든, 노예의 신분으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영국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연한고용 계약을 맺고 온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렇게 초기에 미국에 온 흑인들은 계약기간이 지난 뒤 자유의 몸이 돼서 상인이 되거나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앨리슨 교수//
“그러니까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진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이들을 평생 노예로 부리고, 이들이 낳은 자녀도 재산으로 삼아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란 말입니다. 1600년대에 점차적으로 노예제도가 발전했는데요. 16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 말에 걸쳐 버지니아의 영국인 이주자들이 흑인 노예를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북부에서도 부두나 공장, 건설현장 같은 곳에서 흑인 노예를 쓰기도 했지만 그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많을 경우, 전체 인구의 10 퍼센트 정도를 차지했는데요. 반면에 남부에서는 흑인 노예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담배와 쌀, 사탕수수, 목화, 염료로 쓰이는 인디고 등 미국 남부에서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농장이 발달하면서,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었다. 1750년에 이르자 미국 내 흑인 노예의 수는 20만 명에 달했고, 5년 뒤인 1755년에는 거의 70만 명으로 늘어났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경우, 흑인 노예 인구가 백인 인구를 훨씬 능가했고,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 주에서도 흑인 노예들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노예 수요가 증가하면서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게 됐고요. 노예가 비싼 값에 팔리면서 노예는 곧 부의 척도, 신분의 상징이 됐습니다. 노예를 다른 곳에 되팔면서 이득을 얻는 경우도 늘어났는데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그린스보로 대학교 역사학과 로렌 슈웨니거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슈웨니거 교수//
“서아프리카 노예무역이 있고, 미국 내 노예무역이 있는데요. 1820년대에서 1830년대 미국에서는 국내 노예무역이 큰 돈벌이였어요. 큰 노예매매 회사가 있었고, 노예상인이나 노예매매 회사가 자체적으로 수용소를 만들어놓고, 노예들을 가둬놓곤 했죠. 볼티모어, 워싱턴 디씨,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 이런 노예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버지니아에서 노예를 사서 남부에 데려가면,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버지니아에서 4백 달러에 노예를 샀다면, 뉴올리언스에 데려가서 7백50 달러에 파는 겁니다. 이런 미국 내 노예 거래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오는 거래의 2배가 넘었습니다.”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부리며 편안한 생활을 누렸고, 노예 상인들은 덕분에 큰 돈을 벌었지만, 노예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요.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채찍질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작업감독의 채찍질 소리에 동이 트기도 전에 잠을 깼다. 작업감독은 노예들의 움직임을 감시했고, 노예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가차없이 처벌했다. 낮 12시가 되면 노예들은 2시간 동안 작업을 멈췄다. 물론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확히 오후 2시가 되면 노예감독은 노예들을 다시 농장으로 불러모았다.” (시공사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중에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노예들이 도망가는 경우도 발생했는데요. ‘도망 노예: 농장의 반항아’란 책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역사학자 로렌 슈웨니거 교수에 따르면 노예가 도망치는 일은 매우 흔했습니다.

//슈웨니거 교수//
“1년에 적어도 5만 명 가량의 노예들이 달아난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부분의 농장 주인들은 도망 노예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죠. 노예들은 숲 속으로 들어가 숨거나, 다른 도시나 마을로 달아났는데요. 무사히 도망치는 노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잡혀서 농장으로 돌아오거나 감옥에 갇혔죠.”

슈웨니거 교수는 도망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도망갔다가 잡힌 노예는 채찍으로 맞은 뒤 한 동안 사슬에 묶이거나, 겨우 하루 쉬는 일요일의 자유마저 빼앗겼고요. 주인 이름의 머리 글자를 낙인으로 찍히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슈웨니거 교수//
“현상금을 노리고 도망 노예들을 쫓는 전문 사냥꾼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고요. 도망 노예를 잡는 일은 주로 마을 보안관이나 치안 판사, 도시에서는 경찰이 담당했습니다. 도망 노예를 잡으면 일단 감옥에 가둔 뒤 지방 신문에 광고를 내는데요. 일정 기간 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경매를 통해 다른 곳에 팔았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닌 경우, 노예들이 일종의 휴가라고 생각하고 도망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주인이 심하게 혼내지 않으리란 걸 아니까, 한 1주일 정도 숲 속에 숨어서 쉬다가, 제 발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죠.”

노예들은 재산의 일부로 취급 받았지만, 스스로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습니다.

//슈웨니거 교수//
“주인이 허락하면 쉬는 시간에 다른 데 가서 일하고 돈을 벌 수도 있었고요. 텃밭을 가꿔 채소를 재배해서 내다 팔기도 했죠. 또 바구니를 만들어 팔거나, 드문 경우지만 가축을 기르기도 하면서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 농장 주인들이 일을 더 잘하란 뜻으로 얼마 안 되는 액수지만 노예들에게 보수를 주기도 했고요. 노예들에게 경작지 일부를 떼줘서, 그 땅에서 나는 작물은 시장에 나가 팔도록 허락한 주인들도 있었습니다.”

노예들 중에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자유의 몸이 된 경우도 있었는데요. 1770년에 이르면 미국 내 자유흑인의 수는 4만 명에 달했습니다. 다시 슈웨니거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슈웨니거 교수//
“주인이 노예를 풀어주라고 유언장을 남기거나, 아니면 나중에 언제 풀어주겠다는 계약서를 써주거나 하는 식으로 흑인 노예들 가운데 해방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쉬는 시간에 다른 데서 일을 해서 재산을 모아서, 가족이나 자신의 자유를 돈을 주고 산 노예들도 있었고요. 주인을 화재에서 구했다거나, 홍수가 일어났을 때 주인 가족을 구했다거나, 뭐 이런 영웅적인 행동을 했을 때, 아니면 노예들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거나 했을 때, 공로를 인정받아서 자유의 몸이 되기도 했죠.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이르러 미국 남부 여러 곳에서, 특히 버지니아, 메릴랜드, 델라웨어 등에서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하지만 1793년에 목화씨를 빼내는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해방노예의 수가 줄어들게 되는데요. 목화 재배가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각광받게 되면서, 다시 노예의 수요가 커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는 아직 머나먼 꿈이었습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발달한 과정을 살펴봤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노예제도 폐지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부지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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