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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1923년 일본서 발생한 관동 대지진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카리브 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티에서는 지난 달 12일에 발생한 이 지진으로 2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 사회가 즉각적인 구호 노력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구호품 배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많은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진에 대한 걱정에서 많이 자유로운 편인데요. 한인들이 직접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진은1923년에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 대지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많은 한인들이 아픔으로 기억하고 있는 지진인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1923년의 관동 대지진에 관해 전해 드리겠습니다.

“1923년 9월 1일, 토미 라이언 소위는 요코하마의 그랜드 호텔 라운지에서 친구 벤자민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오를 2분 정도 남겨놓고, 갑자기 호텔 바닥이 흔들리더니 위로 솟아올랐다. 처음에 라이언 소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요코하마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들리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의자와 탁자가 공중으로 날아 오르고, 지붕이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라이언 소위는 본능적으로 가까운 창문을 통해 밖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몇 초 만에3층짜리 호텔 건물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조슈아 해머 ‘불타는 요코하마’중에서)

네, 조슈아 해머 씨가 쓴 ‘불타는 요코하마’란 책을 보면 관동 대지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동양 최고의 호텔로 꼽히던 요코하마의 그랜드 호텔은 이처럼 한 순간에 잔해 더미로 변했는데요. 같은 시간 도쿄와 요코하마를 비롯한 일본 관동 지방 전역에서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도로가 솟아오르고, 커다란 구덩이가 생기면서 자동차와 인력거를 삼켜버렸습니다.

“12살 난 소년 츠치야 시게오는 막 학교에서 돌아와 누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방안에서 단팥죽을 먹고 있었다. 12시 2분전쯤 갑자기 바닥이 흔들리더니 시게오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방 한가운데 화로의 석탄이 흩어지면서 다다미에 불이 붙었다...... 할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온 시게오는 혼란에 휩싸인 거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울부짖는 사람들 뒤로 온 동네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조슈아 해머 ‘불타는 요코하마’중에서)

그렇습니다. 지진이 발생하던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불을 피우고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지진의 충격으로 가옥과 건물에 불똥이 튀어 불이 붙게 됐고요. 때마침 불어오던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불길이 번졌던 겁니다.

//해머 씨//
“당시 화재가 발생한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불에 타기 쉬운 목재로 집을 지었고, 또 집을 바짝 붙여서 지었거든요. 또 화학물질을 다루는 사진관 등이 주택가에 있었는데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어요. 또 일본인들은 다다미 방에 화로를 만들어 놓고 요리하는 풍습이 있잖아요? 지진이 일어났을 때가 점심 시간이었거든요. 또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마침 태풍이 불고 있었다는 겁니다. 강풍이 불길을 부채질하는 효과를 가져온 거죠.”

관동 대지진을 소재로 한 ‘불타는 요코하마’란 책의 저자인 조슈아 해머 씨의 설명을 들으셨는데요. 해머 씨는 도쿄 인근의 항구 도시 요코하마의 경우, 지진이 발생한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완전히 화염에 휩싸였다고 말했습니다. 도쿄의 경우는 그 정도로 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시의 50 퍼센트 내지 70 퍼센트가 화재로 파괴됐는데요. 지진으로 인해 수도관이 파손되면서 불길을 잡기가 더욱 어려웠고요. 지진이 발생한 후 이틀이 지난 9월 3일 아침에야 이 불길이 잡혔습니다.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소한 10만 명, 많게는 1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가장 큰 사망 원인은 바로 화재였습니다.

//해머 씨//
“혼슈 섬 연안의 진앙지 인근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면서 지난 2004년 동남아에서 발생한 쓰나미 즉 지진 해일 같은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혼슈 남부의 여러 마을이 피해를 입었죠. 그러니까 지진과 화재, 큰 파도,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일본 관동 지방을 강타한 거죠.”

관동 대지진은 그 때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가운데 최악의 것이었습니다.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에 이어 수백 차례 여진이 발생하면서, 이로 인한 화재와 지진 해일로 10만 명 이상이 숨졌고요. 1백9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총 57만 채의 가옥이 파손됐는데요. 당시 일본이 입은 재산 피해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할 때 미화로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실종된 상태나 다름 없었다고, ‘불타는 요코하마’란 책의 저자인 조슈아 해머 씨는 지적합니다.

//해머 씨//
“지진 발생 직후 아이티 사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각료들이 흩어졌고 통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죠.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악하기까지 이틀이 걸렸으니까요. 처음 이틀 동안 도쿄는 혼란 그 자체였죠. 전신이나 전화, 교통 등 이를 맡아서 지휘하는 기관이 없으니까, 뭐 하나 제대로 운영되는 게 없었죠.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던 겁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요코하마에 있던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이 초기 구호 노력을 주도했는데요. 해머 씨는 이를 현대적인 국제 구호 노력의 첫 번째 사례로 보고 있습니다.

//해머 씨//
“그렇게 보입니다. 도쿄에서 통신이 완전히 두절됐다고 앞서 말씀 드렸지만, 당시는 무선 통신이 발달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도쿄 외곽의 무선 통신사가 지진이 발생한 지 12시간 만에 외부에 알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미국의 주도 아래 국제 사회의 구호가 답지했는데요. 지진이 발생한 후 5~6일이 지나서 많은 배들이 요코하마 항에 도착해서 구호 물자를 나르고 이동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또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제공하고, 시신 처리를 돕고, 난민촌을 세웠고요. 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은 외국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도 도왔습니다. ”

일본에서 큰 지진이 발생한 사실을 접한 미국인들은 즉각 모금운동에 들어갔고요. 불과 며칠 만에 1천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모금운동이 벌어졌는데요. 하지만 일본은 외국의 원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일본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개항과정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1853년 7월 8일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전함 네 척이 1천 명 이상의 해군과 해병대원들을 태우고 도쿄만 입구 우라가 해협에 모습을 드러냈다. 페리 제독이 거느리고 나타난 검은 증기선을 보고 일본인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증기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검은 증기선을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용’이라고 묘사했다.”

네, 이렇게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던져주며 등장한 페리 제독은 일본 왕에게 보내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밀러드 필모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보낸 친서에는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길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요. 페리 제독은 일본 측에 친서를 전하며, 내년에 다시 올 테니 잘 생각해 보라며 위협적인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2월, 페리 제독은 전함 8척을 끌고 다시 나타났는데요. 기세에 눌린 일본은 마지 못해 협상에 임했고요. 1854년 3월 31일, 미국에 일본 항구 두 곳을 개방하고 최혜국 대우를 약속하는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됐습니다.

포함외교로 불리는 강압에 의한 개방이었지만, 이후 일본은 개혁파의 주도 아래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메이지 왕이 상투를 자르면서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이 시작됐고요. 서방에 대한 문호개방이 촉진됐습니다. 하지만 이에 저항하는 보수파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1923년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일본은 개방을 추진하는 개혁파와 서양에 적대적이던 보수파의 세력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고 조슈아 해머 씨는 설명합니다.

//해머 씨//
“1923년에 일본은 서방에 문호를 개방한 지 50여 년 정도 밖에 안 된 상태였습니다. 메이지 왕이 즉위한 뒤 요코하마가 개방의 중심지가 됐는데요. 미국인, 스페인인, 영국인, 프랑스인 등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요코하마에 머물렀습니다. 일본의 비단이 수출되고, 서양 상품이 들어오는 곳이 바로 요코하마였죠. 당시 도쿄는 덜 개방돼 있었고, 군부의 힘이 강했습니다. 이들은 폐쇄적이었고, 서양의 영향이 들어오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보수파와 개방파로 분열돼 있었다고 봐도 좋을 텐데요. 서구의 문화와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고 개방하려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벌어지는 가운데, 보수파들이 이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본 보수파는 미국인들의 전신을 방해하는 등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슈아 해머 씨의 설명입니다.

//해머 씨//
“특히 보수파 일본인들 사이에서 미국이나 외국에 대한 불신과 피해망상이 있었어요. 외국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했던 거죠. 또 자존심 문제도 있었습니다. 외국의 원조를 받아들이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약한 모습이나 외국에 의존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구호품을 거절하거나, 구호품이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당시까지 일본 최악의 지진이었던 관동 대지진은 일본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무장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관동 대지진 직후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권력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해머 씨//
“그렇게 단정짓는 건 비약이라고 보는데요. 1923년에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13년 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기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관동 대지진은 일본 역사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고, 확실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미국은 원조금과 의료진, 물자를 제공하는 등 일본의 재해복구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 후 미국에서는 일본이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란 인식이 팽배하게 됐고요. 지진 발생 다음 해인 1924년,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일본인들을 차별하는 가혹한 이민법을 승인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후, 미국과 일본이 해외에 주둔하는 일본군 철수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1939년에 미일 통상조약이 파기되기에 이르는데요. 그리고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게 됩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1923년에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 대지진에 관해 전해 드렸는데요. 다음 주 이 시간에는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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