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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한민족의 역사를 바꾼 귀화인들 – 효종의 북벌정책에 관여한 서양인 최초의 귀화인 박연


안녕하세요? 화제가 되는 뉴스를 중심으로 역사를 더듬어가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최근 방송인 이참 씨가 귀화인 최초로 한국 공기업 사장에 임명됐는데요. 이와 관련해 한민족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귀화인들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서양인 최초의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는 네델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 박연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탐나는도다’란 제목의 TV 연속극이 방영됐습니다.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독특한 소재로 화제를 모았는데요. 이 연속극의 배경은 17세기 조선시대였습니다. 제주도 해녀 버진이 해변에 밀려온 영국 청년 윌리암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그렸는데요. 제주도 해녀와 영국 귀족 청년이 언어와 풍습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우정을 나누게 된다는 이 연속극의 내용은 물론 허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17세기 조선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653년 8월 15일 밤 1시경 망을 보던 사람이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다!’……. 우리는 곧 닻을 내리고 배를 돌렸는데 거친 파도와 심한 바람 때문에 닻이 지탱을 못 했다. 그 때 갑자기 배가 바위에 부딪쳐서 세 번 충돌하는 사이 배 전체가 산산조각 나 버렸다.”

네, 17세기 중반에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쓴 항해일지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이었던 하멜은 상선을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합니다. 13년 동안 조선에 강제로 억류됐던 하멜은 1666년에 동료 7명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고요. 억류 기간 동안의 밀린 임금을 회사에 청구하기 위해 항해일지를 썼는데요. 흔히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항해일지에서 하멜은 제주도 표류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아름답던 배는 산산조각 나고 64명의 선원 중 불과 36명만이 살아 남았다. 우리 모두는 비참한 심정이 되어 사람을 찾아 나섰다……. 정오 조금 못 되어 대포의 사정 거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에게 손짓을 했지만 멀리 도망가 버렸다…… 저녁 무렵에 약 1백 명 정도의 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우리 인원 수를 세고 밤새 우리를 감시했다…….”

이후 하멜 일행은 제주 관청으로 끌려가 감금생활을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전혀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10월 29일 오후에 서기와 일등항해사, 그리고 하급선의가 제주 목사에게 불려갔다. 그 곳에 가보니 긴 붉은 수염을 한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제주 목사가 그를 가리키며 ‘어떤 사람’이냐고 묻길래 ‘우리와 같은 네델란드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제주 목사는 웃으며 ‘그는 조선 사람’이라고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조선 무관의 복장을 한 서양인을 만난 것인데요. 흰 피부에 금발 머리를 한 그 서양인의 이름은 얀 얀스 벨테브레……. 하멜과 같은 네델란드 출신이었습니다. 하멜은 벨테브레가 57살 내지 58살 정도로 보였다고 일지에 기록했는데요. 조선에 너무 오래 살아서인지, 처음에는 더듬거리며 네델란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브나이에 교수//
“벨테브레는 1628년에 조선에 왔습니다. 당시 아시아와 교역을 하던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VOC는 항해 중에 중국 선박이나 스페인 선박, 포르투갈 선박 등을 만나면 모두 납치하도록 했어요. 벨테브레는 원래 네델란드 상선 우베르케르크 호에 타고 있었는데, 이 배가 중국 범선을 공격해 장악했습니다. 중국 범선을 장악한 후 네델란드 선원들의 절반이 중국 배에 옮겨 탔고요. 중국 선원들의 절반은 네델란드 배에 옮겨 탔죠.”

한국 국민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헨니 사브나이에 교수는 벨테브레, 하멜과 같은 네델란드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귀화인인데요. 평소 한국 역사, 특히 하멜과 벨테브레의 생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습니다. 사브나이에 교수는 당시 벨테브레가 중국 배에 옮겨 탔다고 설명했는데요. 벨테브레가 옮겨 탔던 중국 범선은 그 후 소식이 끊어지게 됩니다.

//사브나이에 교수//
“제 생각에는 태풍을 만났을 때 중국인들이 네델란드인들을 제압하고 다시 배를 장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네델란드 선원들이 다들 물에 빠지거나 죽임을 당하면서 세 명만 살아남았다고 보는데요. 중국인들이 그 세 명을 어딘가 해안에 버려두고 가버린 겁니다. 세 사람이 버려진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은데요. 전라남도 해남이란 설과 제주도란 설,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난데 없이 해안에 나타난 금발 머리, 파란 눈의 서양인들은 조선에 큰 골치거리를 안겨줬습니다.

//사브나이에 교수//
“조선인들은 네델란드인 세 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 했습니다. ‘왜나라’, 즉 일본 측에 넘기려고 했지만 일본 측에서도 반기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본 사람이 아니란 걸 보면 모르겠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이나 일본, 중국은 서로 상대국 국민이 표류해오면 돌려보내곤 했습니다.”

사실 한반도에 발을 디딘 서양인은 이들 네델란드인 세 명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박기현 씨//
“공식적인 기록은 1600년대에 나타납니다. 주앙 멘데스란 사람의 기록이고, 그 이전에는 선조 15년 정월에, 선조 수정실록에 보면 마리이란 사람이 나오는데 국적이나 아무 기록이 없어요. 외국인에 대한 기록은 주앙 멘데스가 처음입니다. 주앙 멘데스 같은 경우는 아예 표류하다가 잡혀서 넉 달 정도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최초고요. 북경으로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나중에 돌려보내게 됐고……”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의 저자 박기현 씨는 당시 조선은 서양인이 표류해오면 모두 중국으로 송환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렇다면 네델란드인 벨테브레는 왜 중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박연이란 새 이름까지 얻으며 조선에 남았던 것일까요? 벨테브레와 같은 네델란드 출신인 국민대학교 사브나이에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사브나이에 교수//
“당시 조선은 중국의 청나라와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만주족인 청나라가 막 중국 땅의 절반을 장악하고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벨테브레, 즉 박연은 병서에 재주가 있고 대포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조선은 박연의 총포에 대한 지식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라고 박기현 씨는 설명합니다.

//박기현 씨//
“그 당시에 총, 조총에 대한 공포증 같은 것이 많이 생겼죠. 임진왜란 때부터…… 그래서 총에 대한, 총과 대포에 대한 개발 욕구가 있었어요. 북벌 이런 얘기를 계속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조총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굉장히 데리고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박연의 경우, 그것이 되는 걸 발견하고 훈련도감 안에다 구인후 대감 밑에 아예 정식 소속을 시키고 거기 뒀어요.”

실제로 박연을 비롯한 네델란드인 세 명은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군에 맞서 싸웠고요. 다른 두 사람은 전쟁터에서 사망하고 박연 혼자만 남게 됐습니다. 박연은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해 훈련도감에 들어가서 각종 화기 개발에 힘쓴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처음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송환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기현 씨//
“나중에 박연이 계속해서 보내달라고 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보면 인조가 그렇게 놀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보지 그러냐, 이렇게 놀렸다고 하는데, 박연은 아마 굉장히 상처를 입었을 겁니다.”

이 같은 내용은 하멜 표류기에도 나오는데요. 박연은 여러 차례 왕과 관리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며, 조선은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박기현 씨//
“박연이 회유를 하죠. 가봐야 안 된다, 너네 일본 가면 죽는다, 나가사키에 보내달라고 자꾸 요구를 하거든요. 가면 죽으니까 여기 있어라, 잘 대해줄게…….”

박연은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소속시키고 이들을 지도했는데요. 그러던 중 하멜 일행 중 2 명이 청나라 사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하멜 일행은 전라도 강진의 병영으로 유배됩니다. 박연은 이들이 떠날 때 한강변까지 나와 배웅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박연과 하멜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1666년 9월 4일, 하멜은 동료 7명과 함께 조선을 몰래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박기현 씨//
“이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여러 군데 배치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탈출 시도를 계속 한다든지, 그 위의 관원들이 계속 학대를 해요, 외국인이 이상하게 생겼으니까, 그 바람에 이 사람이 도저히 여기서 못 살겠다, 어쨌든 죽기 살기로 한번 나가보자 생각을 하고 도망 나가게 됐죠.”

하멜은 나가사키에 1년 동안 억류된 뒤 마침내 고국 네델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요.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들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의 외교 교섭을 통해 풀려났습니다.

//사브나이에 교수//
“제주도에 표류한 생존자 36명 가운데 한 명은 한양으로 송환되던 중 사망했고요. 13명이 전라도 병영에서 죽었습니다. 남원이나 여수 등지로 분산된 후에 또 몇 명이 사망했죠. 하멜이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인은 모르지만 아마 자연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2명은 한양에 있을 때 청나라 사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감옥에서 굶어 죽었죠. 그리고 나머지는 하멜과 함께 탈출하거나 나중에 일본을 통해 송환되는데, 요리사 한 명은 끝까지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에 남았다고 합니다.”

하멜이 쓴 항해일지는 네델란드를 비롯한 유럽 사회에서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코레아’란 이름의 상선을 건조하는 등 조선과 통상을 트려고 노력했는데요.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고요. 한국과 네델란드는 그로부터 3백여 년이나 지나서 1961년 4월 4일에야 정식으로 단독 수교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과 네델란드는 2001년 1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하멜 표류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서양인 최초의 귀화인 박연……. 효종의 북벌정책에 관여해 각종 화포 개발에 기여했고요. 하멜 일행을 대할 때도 모국인의 입장에 서지 않고 조선의 관리로서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박연은 하멜 일행을 만났을 당시 이미 조선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두고 있었는데요. 그 후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도 한반도 어딘가에 네델란드인 벨테브레, 박연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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