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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3년 남북한 접촉 비화 출간한 前 남북접촉 전략수행원 이병웅 교수


남북한 체제대결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부터 2004년까지 남북회담과 적십자 인도주의 사업 분야에서 30여년 동안을 재직해온 남한 한서대 이병웅 교수가 최근에 33년의 남북접촉 비화를 정리한 ‘평화의 기(旗)를 들고’라는 회고록을 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교수로부터 이 책의 발간 취지와 남북접촉 수행원으로 외길 33년을 걷는 동안에 그에 가슴 속에 품어 두었던 얘기들을 들어 봅니다.

서울에 박세경 기자가 이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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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전문]

질문) 먼저 책을 내시게 된 취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이 교수) 오랫동안 제가 남북관계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있었고 보람 있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기록을 남길 때에는 늘 정사(政事)적인 기록만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회담장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뒷얘기들을 메모해 놓았는데 최근에 제가 33년 재직하고 그만두니까 주변에서 그 뒷얘기 들을 조금씩 모아서 그래도 남겨 놓은 것이 이 다음 후대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용기를 내어 필력은 별로 없지만 묶어 책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처음 대북한 접촉업무를 시작하실 때가 1971년이었으니까요 남북관계 국제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죠? 당시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나요?

이 교수) 그 당시 전반부에는 북측(북한)이 남쪽(남한) 보다 경제적인 모든 면에서 우위였습니다. 1971년도에 와 남북이 GNP(국민총생산)가 같아지고 그런 상황에서 남쪽은 경제적인 도약을 하기 위한 여러가지 중공업이라든가 이런 것이 시작되는 단계였구요 그런 단계에서 북은 무력을 많이 강화하고 그렇게 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이 많이 고조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이 키신저(당시 미 국무장관)가 중국을 방문하고 닉슨(당시 미 대통령)이 방문하면서 화해의 시대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그래도 평화를 유지해야 남쪽에 경제적인 부흥도 일으킬 수 있고 또 남북이 전쟁없이 살 수 있겠지 않느냐는 뜻에서 남쪽에서 먼저 북측에 남북회담을 하자고 제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휴전협정 후 처음으로 1971년9월에 첫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첫회담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이 교수) 남북회담을 처음으로 하는데 그 전까지는 서로가 ‘괴뢰’라고 그러고 서로 대결하고 또 군사적으로 긴장되었던 상태였는데 이런 상태에서 남북간에 처음으로 만남을 가지게 되니까 모든 부분에서 경쟁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발언을 하는데도 먼저하겠다며 서로가 주장을 하면서 얘기를 나눴고 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물건을 준비하는 것도 서로 자기측 것이 좋다며 이렇게 여러가지로 경쟁적인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기자들이 기사를 쓰는 것도 전체가 자기 것이 우월하다며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며 회담을 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화해를 하기 위한 회담이라기보다는 서로가 대결의 시대 회담이었기 때문에 늘 긴장된 분위기 속에 회담이 진행이 됐었죠.

질문) 방금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의 경제사정이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따라서 남북한 회담시에 남한이 북한한테 우월감을 보이려는 해프닝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이 교수) 거의 50년대 60년대 초반까지는 북측은 사회주의 경제에서 상당히 좀 앞서 있었구요 남쪽도 여러가지로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측은(남한) 좀 수세에 있었고 북측은 상당히 공격적인 대화의 현장이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산가족을 찾아 주는데 있어서도 대상을 정하는데 이북에서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포함해 자유롭게 남쪽지역 어디든지 막 돌아다니면서 찾도록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쪽은 그렇게 되면 이게 이산가족 찾는 것이 아니라 체제선전을 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한 활동이지 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계를 하게 되고 이후 대화가 어려워졌고 그런 상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뀌어 가지고 오히려 남측에서 이산가족이 고향을 찾아 가자고 하는데 지금 평양 외에 다른 곳은 가지 못하게(북한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는 상당히 북측은 적극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입장이었고 남쪽은 수세적인 대화 분위기였습니다.

질문) 1992년에 남북고위급 7차회담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남한측의 건배제의에 북한측이 반발했던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이 교수) 여름에 서울에서 열린 회담 때에 우리측 요원이 식탁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며 건배제의를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북한대표단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 우리는 하나라니 무슨 소리냐 우리를 흡수통일 하자는 것이냐”며 언성을 높이고 상당히 아주 격분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시대에 왜 그렇게 되었냐하면 독일이(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이 됐거든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하나다라는 자체가 아마도 남측에서 북측을 흡수통일하자고 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냐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격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또 그런 어려운 일이 있어서 ‘우리는 하나’라는 표어가 한때 또 사용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질문) 북한이 남한의 대북한 쌀지원 보류에 대해서 이산가족상봉 중단이라는 강수를 들고 나왔지 않습니까? 북한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요?

이 교수) 이산가족은 정말 인도주의적 차원의 문제인데 왜 그렇게 됐나 싶은 것은 지금 사실은 이산가족이 북에서 남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북에 남쪽으로 적어도 8.15해방 이후에 400만명 가까이 나와서 남쪽에 이산가족이 많고 그러기 때문에 북쪽은 남쪽에서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부분이 이산가족사업이라는 것을 알고 저쪽(북한)에서 발표가(중단한다는) 나온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인도주의적 문제이기 때문에 이산가족 문제만은 식량이나 비료나 어떤 문제하고도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북에서 빨리 이산가족 문제가 해결이 되도록 호응해 나와야 되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질문) 끝으로 보다 성숙한 단계의 남북한관계 발전을 위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 교수) 지금 남북관계가 참으로 어려운 관계에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 어떻게 보면 다 대화는 하자고 하는데 이게 틀어져 있는 것이거든요 예를들어 북은 미국과 직접대화를 하겠다 미국은 6자회담 내에서 양자대화를 하겠다 이렇게 대화는 하겠다고 하는데 내용이 다른 차원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은 미사일문제가 해결돼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루빨리 북쪽이 미사일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미국이 지금 제한하고 있는 북한의 여러가지 금융이라든가 여러가지 제한 문제가 풀릴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어쨌거나 저희들 희망사항은 빠른 시일 내에 북한이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고 또 미국이 여러가지 제한조치를 해결하는 이런 대화가 6자회담을 통해 빨리 이루어져 그렇게 됨으로써 한반도에 평화가 오도록 해야 되지 않겠는가 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한국과 미국이 가깝고 또 북한과 미국이 가까워짐으로써 한반도가 정말 평화로운 나라가 되고 우리 후손들이 마음 놓고 살수 있는 땅이 되지 않겠나 그렇게 해결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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