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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리 근무 KBS 아나운서 강창선 회고담


한국어 방송 50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 : 강 창선 (노시창)


엠씨: 오늘은 미국의 소리 개국 50주년을 맞아서 원로 방송인을 찾아 뵙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1960년대 초 미국의 소리 한국어과에 파견 근무를 했던 현 한국 방송 공사 강창선 경영 이사와의 대담을 보내드립니다. 대담에 노 시창 기자입니다.

노: 많은 청취자들, 특히 연세가 드신 분들은 오래전, 태평양 건너 워싱턴에서 보내오던 강 이사님의 목 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미국의 소리에서 근무하신때가 언제였는지요?

강: 제가 미국의 소리 방송에 근무한 것은요, 64년 2월부터 66년 10월까지, 그러니깐 2년 8개월, 약 3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노: 요즘, 특히 젊은 분들은, 60년대 시대상이 어떠했는지 잘 모르실것 같은데, 대강 그때가 어떤 시기였는지 설명해주시죠.

강: 64년… 하니깐, 5.16 군사혁명 지나서 1년때, 박정희 정권이 틀이 잡혀갈때… 그런 시기였었죠. 그런데 경제적인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나라도 길거리를 가면 자동차가 홍수고, 집집마다 냉장고 없는 집이 없고,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 때만 해도 자가용은 꿈도 못 꾸고요, 부엌에 냉장고 있는 집 없었고, 그 당시는 집에 전화만 갖고 있어도 중류 이상이라고, 그런 시대였습니다. 하니깐 미국 가보니깐 그야 말로 별 천지 같이 휘황 찬란하더군요.

노: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때 미국과 한국의 경제 상황은 그렇게 달랐는데, 방송인들도 그때 당시에는 외국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참 드문 일이었는데요… 어떤 계획에 의거해서 가셨는지요?

강: 네, 그땐 USIS와 한국 KBS 방송국에 협약이 있었죠. 그 계획에 의해 아나운서 한사람씩을 파견해서 2년 근무하고 돌아왔죠. 그래서 계속돼왔던 것이… 이사람도 작고했고 두사람 다 죽었습니다만, 장기범씨라고 다녀오고, 그 다음에 강희수라고 다녀왔어요. 그 뒤로 해서 제가 다녀왔죠. 그런데 내 뒤를 이어서 그런 케이스로 갔는데, 이광재… 그땐 또 송환규, 김용호, 이 세사람인것 같은데, 2년이고 3년이고 끝나고 눌러 붙어 오질 않았어요. 그래서 이제 KBS하고 그 부처하고 협약하던게 다 깨지고 말았죠.

노: 거기에서 방송을 하시면서 함께 일하시던 분들, 지금도 기억나는 분들이 좀 계십니까?

강: 네, 다들 작고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박경호씨라고 우리나라 초창기 음악가입니다. 피아니스트고, 번역 담당이었고… 유명한 만담가 목사님 황재경씨, 몇해 전 돌아가셨죠? 또 이계원씨라고 KBS 아나운서 출신 선배가 있죠. 그분도 돌아가셨고.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나의 전에 다녀온 장기범씨, 강희수씨 이젠 두분다 고인이 되고 말았어요. 내가 너무 오래 살고 있는것 같아요. (웃음)

노: 지금은 70청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가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상당히 한반도에도 정치적으로 변화가 심했을때인데요. 방송하시면서도 자연히 그와 관련된 뉴스도 다루시고 그러셨을텐데… 방송과 관련된 기억나는 일화 하나 소개시켜 주시죠?

강: 네, 내가 맨 처음에 미국의 소리 사무실에 출근해서 놀랜 것이요.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 자유세계의 본산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동서 냉전이 점점 깊어갈 무렵인데… 지금도 그래서 우리 한국만 해도 무슨 불언문서 이게 나오면 전부 줏어 가지고 경찰서에 신고하게 되있는데… 거길 갔더니 front desk를 찾아가면 견학오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receiver를 줘요. Receiver를 끼고 건물안을 걸으면 설명이 나오는데, 걸어가는 복도 좌우벽을 그냥 전세계 공산주의 국가에서 미국을 극악하게 표현한 포스터… 북한은 물론이고, 그 당시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모스크바, 다 그걸 붙이고 보여주고 있어요. 미국이 얼마나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미움 받고 있나. 그러다 보면은 또 스크린을 탁 내리면, 필름이 방영되는데 거기는 세계 각국에서 여기저기에서 미국의 USIS가 습격당하고 책자를 뜯어내다가 불질르고, 성조기를 태워버리는 극악한 양키 고홈을 외치면서 반미 데모하고… 그걸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야! 과연 이 나라가 큰 나라로구나, 전 그렇게 느꼈어요.

노: 5.16 혁명과 관련된 그 시긴데, 그와 관련된 뉴스는 없으셨습니까?

강: 혁명과 직접 관련된건 뭐… 그 때도 시간이 좀 지났으니깐, 그런건 별로 없었고, 하나 잊을수 없는게 있는데… 65년돈가. 내가 갔던 다음해인가. 우리 박정희 대통령이 서부 독일을 방문했죠? 그 당시에 내가 내 목소리로 녹음을 했어요. 그 때만 해도 미국의 소리에 낮에 출근을 해서 녹음을 하고 나오면 밤에 재생한 것을 중계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뉴스 첫머리가 뭔가 하면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오늘 서독 무슨 공항에 도착해서 누구의 영접을 받아가지고 이제 곧 한국과 서독의 정상회담이 열릴것이다. 이런 뉴스를 내 목소리로 녹음 하고 돌아갔댔어요. 아침에 자고 나오니깐 사무실에 난리가 났어요. 왜냐하면 한국 대사관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이지. 막 항의가 들어왔대요. 왜? 박정희 대통령은 떠나지도 않고 한국에 앉아있는데 무슨 서독에 도착해서, 그게 무슨 얘기냐? 그걸 규명해 봤더니요. 재미있어요… 글자 하나가 틀리면 아주 다른 뜻을 갖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마침 그때 박충훈씨라고 경제 기획 장관겸 부총리, 이분이 박정희 대통령이 출발하기 며칠 앞서서 선발대로 갔어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한국말 표기할때 first name은 initial쓰지 않습니까? Chung-hee Park, Choong-hoon Park을 initial로 쓰게 되면 C.H. Park과 CH Park으로 되니깐… 현지에 간 사람이 그걸 확인도 안하고 C.H. Park이 왔으니 한국 대통령이 왔다하고 막 타전한거야. 거기서 빚은 실수였었는데요. 그렇지만 그 사건을 치뤄놓고 나서는 좀 서운하더군요. 아무리 뭐한다고 해도 한국의 대통령이 아니고 무슨 영국의 수상이 왔다고 하면은 이렇게 엉터리 보도는 못했을거에요. 몇번 확인해 가지고 세밀하게 했을거에요. 현지 나가있던 이 USIS 특파원인가 이 사람들이 그냥, 누가 왔어, 공항에?… 아 그 C.H. Park이 왔어?. 아 그럼 한국의 박대통령이구나! 이런 식으로 아마 다루었던것 같아요.

노: 그 때 생활 하시면서 혹시 외국 생활에서 불편은 못 느끼셨습니까?

강: 그런데요. 나 이 말은 꼭 하겠어요. 여러분은 그 곳에 지금 얼마나 대우 받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 곳은 지금 주급으로 받습니까? 격 주로 한번씩 pay check이 나오죠? 근데 제가 뭐 압니까? 이 곳으로 가면 월급 얼마다하고 싸인해서 가긴 갔는데… 받아 보니깐, 한달 따져서 보니깐 월급이 450불 정도밖에 안 돼요. 그 당시는 물론 달러 가치가 지금보다는 크다고는 하지만은 아파트 빌리는게 월 120불인가 하고, 내가 어린딸 셋을 데리고 갔거든요. 얘들 길러야 되죠. Wife,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갔는데 한 두달 참으니깐 도저히 내가 여기 왜 왔느냐. 생활 할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때 한국어과 책임자가, 토렌슨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토렌슨을 찾아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pay check을 내놓면서 “이거 봐라. 내 식구가 지금 다섯명인데 나 pay 이것 밖에 안된다. 생각해 보시오? 이거 가지고 살수 있소. 없소?” 그랬더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좋긴 좋은거에요. 이 사람이 심각하게 동조를 하더니 며칠후에 불러요. 그러더니 당신 대단히 미안하지만은 over-time 하겠냐고. 뭔가했더니, 미국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식 근무를하고 대개 토, 일요일을 완전히 놀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토요일 반나절만 와서 일 더하겠냐? Over-time은 보통 pay에 1,5배를 주지 않습니까? 그걸 특별히 한 2년동안 권해줬어요. 그래서 먹고 살았어요. 또 그게 그러니깐 미국의 소리 방송 직원도 공무원 아닙니까? 공무원도 그렇고 경찰관이고 뭐고, 우리나라와 비슷합디다. 또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고… 나 어릴 적만해도 교사들은요 월급 갖고 살수가 없어서 여름방학 때는 그냥 taxi driver도 하고 뭐 그러했다고 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노: 끝으로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올해로써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어 방송도 역시 5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데요. 이 50주년을 맞이해서 방송계의 대선배로서 저희처럼 외국에 나가 방송을 하는 한국인들, 그 한국어 방송이 나가야될 바람직한 방향이 있다고 하면은 어떤 것이겠는지, 조언을 좀 들려주시죠.

강: 네, 지금 뭐 냉전시대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소련이 이제 완전히 굴복해 들어왔고, 미국이야말로 전세계의 대부 역활을 할 중요한 책임을 질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랬지만은 물론 미국은 미국 시각이 다르고 우리에 시각이 다르고 그러겠습니다만은, 지금같이 공정한 방송, 공정한 보도를 전세계에 해줄 것을 기대해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죠.

노: 오늘 바쁘신 시간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방송 공사 강창선 경영 이사님과의 대담을 보내드렸습니다.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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