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월18일을 `장애자의 날’로 지정하고 사회적 약자인 장애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장애자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무관심 속에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북한이 기념하는 장애자의 날을 맞아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의 삶을 조명해 보는 기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장애인 탈북자 지성호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이연철 기자가 보도합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저 같은 경우는 남한에서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데, 남한 급수로 하면 장애 2급을 받고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급수인데…”

지난 2006년 서울에 정착한 탈북자 지성호 씨가 장애인이 된 것은 1996년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절, 부모를 도와 먹을 것을 구하러 나섰다가 열차에서 떨어져 왼쪽 손목과 왼쪽 다리를 기차 바퀴에 잃었습니다. 당시 나이 16살이었습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제가 태어난 곳이 탄광이다 보니까 석탄을 팔았습니다. 시내에 나가서 팔고, 거기서 이윤이 떨어지면 옥수수 1kg 사가는 정도였는데,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도와서 그런 일을 해야 됐죠. 그러다가 화물열차에서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됐습니다.”

졸지에 불구가 된 지성호 씨는 북한에서 장애인으로 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말했습니다. 장애 때문에 노동을 안해도 됐지만 당국으로부터 배급 등 어떤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솔직히 성한 분들도 굶어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장애인으로서 살아가기는 더욱이나 어려웠죠. 그 당시 우리 마을에만 해도 장애인이 여러분 계셨는데 아사로 다 돌아가신 상황이었고, 저는 그래도 동생들이나 부모님이 대신해서 일하고 해서 그 나마 목숨은 연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성호 씨가 집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해야 했습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일명 꽃제비라고 하죠. 북한말로 꽃제비라고 하는데, 석탄을 팔고 그런 일들을 조금 했었고, 중국을 몇 번 넘나들면서 식량을 구걸해다가 먹고….”

지성호 씨는 그 후 북한에서 시장이 커지고 장사에 대한 통제가 약간 완화되면서 페인트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25살이던 2006년 4월, 마침내 두만강을 헤엄쳐 북한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목발 하나에 의지해 걷고 또 걸었습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당했고, 보조기구도 없이 목발만 짚고 넘어오다 보니까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지성호 씨는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는 기쁨도 컸지만, 그 보다는
북한에서 장애인으로 힘든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환대가 주어진 때문입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깜짝 놀았어요. 저희를 맞아줄 때도 휠체어를 갖고 나와서 맞아주고, 장애인이라고. 그리고 너무 먼 길을 고생했다고, 환영한다고, 축복한다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잘 왔다, 오길 잘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올 때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탈북자들보다 먼저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지성호 씨는 북한에서 장애인으로 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대우에 저절로 남북한의 현실이 비교됐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1998년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처음 ‘불구자협회’를 설립했고, 이후 2005년에 ‘조선장애자지원연맹’으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2003년 6월18일에는 ‘장애자보호법’을 제정했고, 이를 기념해 6월18일을 ‘장애자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난에 빠진 북한에서 장애인들이 당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성호 씨는 말했습니다. 전쟁이나 군사훈련 중 장애인이 돼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사람들 마저 복지 혜택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군 복무 하다가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처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7명, 10명, 20명 씩 패를 지어 여객열차에다 짐을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사는 그런 실정에 있어요”

지성호 씨는 남북한 간에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을 도와주고 양보하려는 사회적 흐름이 확고하게 자리잡았지만, 북한은 장애인 마저 밟고 일어나야 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내가 지금 북한에서 살았으면 어땠을까를 많이 상상해 봅니다. 그 때 생각을 하면 너무나도 한심하고…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한 것 같습니다.”

지성호 씨는 한국에서 중증장애로 분류되는 신체장애 2급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생활보조금이 지급되는 것은 기본이고, 재활보조기구도 모두 정부가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의료비 지원과 자립자금 대출, 자동차세금 감면과 자동차 연료 지원, 공공주택 특별분양, 항공기와 기차 등 교통요금 할인, 이동통신과 인터넷 요금 할인 등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지성호 씨는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복지관이라든가 장애인들을 돌봐주는 기관들이 너무 많아서 너무 잘 챙겨주시고. 그런 것들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북한에서도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평양에는 장애인 직업교육을 위한 조선기능공 양성반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2007년에는 평양에 북한 최초의 장애인 직업재활센터인 ‘보통강장애자종합편의’가 설립됐고, 2010년에는 장애인들이 예술과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대동강 장애자문화센터’가 세워졌습니다.

북한은 오는 8월 말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장애인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등 장애인들을 위한 대외 활동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북한의 장애인 복지정책이 아직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대다수 장애인들은 극심한 차별과 무관심 속에 힘들게 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성호 씨는 대다수 국민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북한에서 장애인들이 홀대받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며, 최소한 장애인들이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북한 당국이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지성호 탈북자] “최소한 북한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장사하는데 있어 장애인들에게 시장의 매점들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다든가 아니면 그에 대한 지원을 해 준다든가 개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주면 좋겠죠.”

지성호 씨는 북한 장애인들의 고통이 하루빨리 덜어지기 위해서라도 북한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소리 이연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