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이차희 씨의 큰 오빠 이원희 씨와 부모님이 만주에서 찍은 사진 (우) 아버지 이상문씨를 '천리마 할아버지'로 소개한 북한 신문 기사 (사진 제공:재미이산가족상봉 추진위원회)
(좌) 이차희 씨의 큰 오빠 이원희 씨와 부모님이 만주에서 찍은 사진 (우) 아버지 이상문씨를 '천리마 할아버지'로 소개한 북한 신문 기사 (사진 제공:재미이산가족상봉 추진위원회)

최근 미국친우봉사회가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과 북한 내 친지들의 상봉을 추진해 온 이차희 씨의 삶을 조명하는 자료집을 냈습니다. 북한에 아버지와 오빠를 둔 이산가족인 이차희 씨는 미 의회에 한인 이산가족 문제를 처음 알리고 20년 간 적극적으로 관련 운동을 이끌어왔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재미이산가족상봉 추진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은 한반도가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만주의 산골 다푸차헤에서 대구로 열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대지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아버지 이상문 씨와 넷째 오빠 이웅희 씨도 곧 뒤따라 온다고 했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우리가 떠나고 나서 1949년에 만주에 반란이 많았다. 중국 정부가 우리 아버지에게 군대를 주고 반란을 진압시켜라. 장개석하고 중국 모택동 군의 마지막 전투가 만주 땅에서 있었는데..”

1950년 아버지는 넷째 오빠를 데리고 만주에서 북한으로 갔습니다. 한편, 한국에서 삯바느질 일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이차희 씨는 대학 졸업 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에 언론 전공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1988년 유년기를 보낸 만주를 다시 방문하며 뿌리찾기에 관심을 컸던 이차희 씨는 이듬해 한인들이 많은 시카고 알바니 파크 지역의 도서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주 정부의 기금을 받아 15만 달러어치 한국 책을 들여놓자 도서관은 곧 한인들의 사랑방이 됐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한국 사람들이 빡작빡작하는 겁니다. 이 노인들이 제 선생님들이고 책을 도와주시고, 친구고, 그 반 이상이 이산가족이었어요.”

이차희 사무총장은 1990년대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을 북한의 가족들과 연결해 주겠다는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렸다며, 자신이 직접 상봉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우리가 너무 모두 절박하니까 이 심리를 악용해서 사기꾼들이 번성을 했습니다. (북한 내 가족과) 얘기가 된다고 하면 은행에 자기 집을 저당잡혔어요. 여기저기 돈 빌리는 사람들, 이 사람들 돈 떼먹고 없어지는 게 허다했다고요.”

마크 커크 전 공화당 상원의원(왼쪽)이 재미이산가족상봉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과 대화하고 있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당시 지역 출신인 마크 커크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와주며 인연을 맺었고, 2000년 들어 함께 한인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했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자기가 하원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소개했다는 겁니다. This is what we can do together. 커크 의원이 저를 의지하고 제가 일을 해야겠고, 사명감이라기 보다도 의무감이죠.”

이차희 사무총장은 1990년대에 북한의 넷째 오빠와 짧게 서신교환을 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우리 조카가 시카고 감리교 목사였어요. 이북에서 가이드한테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 옛날에 이상문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삼촌 이름은 웅희. 그 다음에 평양에서 회의하고 호텔에 왔더니 이 사람들이 그 사이에 개성에 가서 웅희하고 웅희 아들을 데려온 거에요.”

연락이 닿은 오빠로부터 북한에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60청춘’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게됐습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천리마 할아버지’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북한의 넷째 오빠 이웅희 씨가 미국의 큰 오빠 이원희 씨에게 보낸 편지 (사진 제공:재미이산가족상봉 추진위원회)

아버지는 이미 1974년에 돌아가시고, 오빠와는 연락이 갑자기 끊어졌습니다. 본인의 가족 상봉은 무산됐지만, 다른 한인들의 상봉을 위해 계속 힘써왔습니다.

2017년 림프종이 발견돼 암투병을 하면서도 그 해와 이듬해 국무부의 언질을 받고 혹시 성사될 가능성에 대비해 화상 상봉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 활동에 나선 지 20년이 훌쩍 넘고, 그 기간 여러 결의안과 법안들이 미 의회에서 통과됐음에도

상봉이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습니다.

[이차희 사무총장] “20년 전에 시작했을 때 그 때 보수적인 숫자를 낸 게 10만명 정도였습니다. 그 분들이 한을 안고 돌아가셨습니다. 제 손을 잡고.. 우리한테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고 한이 맺히는 일입니다.”

올해 80살인 이차희 사무총장은 이제는 젊은 한인들이 관련 활동을 이어나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제가 믿는 건 이겁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보니까, 피가 물보다 진한 거 있죠. 우리 차세대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너무 뜻밖의 일이고 감사한 거 있죠. 너희 유산이다. 가슴이 아파도, 기뻐도, 너희들의 유산이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