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상봉한 유성,유형준 부자가 워싱턴DC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에서 상봉한 유성,유형준 부자가 워싱턴 의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북한 관련 화제성 소식을 전해 드리는 `뉴스풍경’입니다. 올해 들어 처음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한 탈북 청년이 미국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라디오
[뉴스풍경] 2020 첫 미국 입국 탈북 난민, 아버지와 미국서 재회

[녹취:유형준] “3번을 빌었어요. 정월대보름에 나가서. 아빠 만나지 못해서 못 해서 보기만 해 달라고 그랬는데 3년만에 이뤄진 거예요. 3년 만에…”

가족을 두고 탈북 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유형준(가명)씨.

‘고운 자식 매로 키워야 한다’고 늘 말했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에 화 한번 내지 않은 아버지를 한 번만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녹취:유형준] “어릴 때 집에 돈 500원을 훔쳤어요. 제가 뭐를 사먹는데 아빠가 본 거에요. 저는 ‘죽었다.’ 생각했는데 아빠가 보더니, ‘아빠가 힘들게 번 돈 훔치면 어떻게 하냐’고. 그렇게만 말 하시는 거죠. 엄하게 키우셔서 엄청 무서워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참으로 보고 싶었는지……”  

8살 어린 나이에 떠나 기억은 거의 없는 아버지 이지만 10년 세월을 버티게 해준 사람도 아버지 였습니다.  

탈북을 시도했다 잡힌 친척 때문에 보위부의 감시는 심해지고 돌격대에 들어가 하루하루가 고단했던 유형준 씨가 아버지와 연락이 닿은 건 지난 2017년.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와 엇갈리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두 부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형준 씨는 브로커를 직접 찾아갔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2017년 12월 중국으로 건너와 라오스를 거쳐 태국에 도착하게 됐습니다.   

[녹취:유성] “심양에서부터 고속열차를 타고 갔는데, 영상통화를 했어요.애하고, 태국에서 만났을 때 낯설지 않았어요. 영상으로 계속 통화하고 했으니까 익숙해 지더라고요..”

아버지 유성 씨와 아들 형준 씨의 첫 번째 재회는 형준 씨가 태국 난민 수용소 입소하기 전에 이뤄졌습니다. 

태국내 기독교단체에서 3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유성 씨는 당시 아들을 만나 미국을 권했습니다. 북한에서부터 라디오를 통해 한국과 미국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던 유 씨는 한국에서 정착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유성 씨는 탈북민이라는 신분이 한국에서 정착하는데 여러가지 장애요소가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미국에 가고 싶었던 형준 씨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마음을 정하고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녹취:유형준] “또래 나이는 없었어요. 제가 가장 어렸었어요.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어서 힘들지 않았어요. 1년 동안은 눈 깜빡 하니까 지나갔어요. 그 후가 엄청 힘들었어요. 사람마나 다른데 저는 밤12시 3시 자면, 10시 일어나요. 영어 공부를 하고 4시 되면 운동해요. 푸쉬업 하고 공부 또 하다가 하루 밥 한 끼 먹었어요 처음에는 세끼 먹었는데 8개월 지나서는 두 끼 먹었어요. 쌀이 좋지 않았어요..”

양은 충분했지만 반찬을 따로 사먹어야 했고 닭고기를 튀긴 반찬은 입에 맞지 않고 밥에서는 냄새가 나는 등 음식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을 아니었습니다.  

섭씨 40도의 무더위 속에 한 방에 140명이 들어가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1년이란 기간은 힘들지 않았습니다.  

전화기를 빌려 종종 아버지와 영상 통화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난민 적격 심사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녹취:유형준] “심사는 4개월만에 끝났어요. 4차 담화까지 있어요. 도착 하자마자 1차,2차 담화는 한 달 후에 하고요. 3차 담화는 한국 국정원에서. 4차는 미국정부에서 와요. 저를 조사해요. 첫 번째 담화는 통역원만 와요. 두 번째 대사관에서 오고요. 세 번째 국정원에서 하고요. 오케이 하고 가서, 대기.”

4번의 면담에서 형준 씨는 출신 지역과 최종학력, 거주했던 지역의 환경, 탈북 한 이유와 미국을 선택한 이유 정도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6개월이 지나면 효력이 없어지는 신체검사를 두 번 받았습니다.  

그러나 1년을 넘기면서 난민 심사 합격 소식을 듣기까지 10개월은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녹취:유형준] “푸쉬업하고 복근 운동, 30분 동안 600개 했어요. 매일 했던 운동인데, 엄청 힘든 거예요.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안 하면 짐승 같더라고요. 저는 뭐라도 해야지. 왜냐하면은 거기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밖에 없어요. 저 안에서 공부도 공부 지만 공부도 한계가 있잖아요. 육체적으로 뭘 해야하는데요. 청소도 해요...”  
한국에 있는 아버지도 마음 고생이 심했습니다. 

[녹취:유성] “아, 너무 힘들었어요. 1년이면 갈 줄 알고 있었는데. 야 전에 간 애가 1년 만에 갔어요. 스트레쓰로 머리가 다 빠지더라고요. 차라리 시간을 알았더라면, 1년 이란 기간을 정해놓으면 기다리는게 힘들지 않겠는데,..”

유 성씨는 멀리서 아들을 응원했고 형준 씨도 미국이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한 포기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난민 심사가 통과되고 한 달 만에 태국을 떠나게 된 형준 씨는 인천을 거쳐 지난달 23일 미 동부 버지니아 리치몬드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만나려고 한국에서 날아온 아버지와 두 번째 재회를 가졌습니다. 

[녹취:유형준] “집에온 기분이고요. 엄청 마음이 편해요. 포옹하면서 그냥.. 보고싶었다고 말했어요. 보고 싶었거든요. 엄청 보고 싶었어요. 3년만에 소원이 이뤄진 거에요. 서먹서먹한 게 없어요. 참으로 고맙죠.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거 만도. 아무것도 안해줘도 할말이 없어요……”

아버지 유성 씨는 긴 시간을 꿋꿋이 버텨낸 아들과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녹취:유성]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죠. 거기도 그 같이 침대에 누워서 같이 잘 때 아무리 이렇게 성인이 되고 나보다 키 크게 살았어도 애를 팔베개 해 가지고 자거든요. 자면 애 같죠. 어린애 전혀 컸다는 감이 안 들고, 애 일 뿐이야. 내 품에 있던 애 같아. 먹어도..나한테 애죠..”

아버지에게는 늘 어린아이 같은 아들이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형준 씨는 아버지를 모시고 미국에서 살기 위해 다시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난민수용소에서 ‘아메리칸 드림’ 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는 형준 씨의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겁니다.   

이를 위해 영어공부에 매진할 계획인데요, 미 중서부 시카고내 탈북 난민 영어교육 민간단체 ‘에녹’에 들어갈 겁니다.   

그러나 형준 씨는 자신은 이미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탈북을 했고,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간절히 바라던 미국 정착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거의 없는 유성 씨는 워싱턴 디씨를 방문해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도 가졌습니다.

이 주가 채 안되는 짧은 일정으로 아들을 만나고 12일 한국으로 돌아간 유성 씨는 아들에게 짧은 당부의 말을 남겼습니다.   

[녹취:유성] “몸으로 부딪히는게 최고다. 이때까지 잘했으니까. 지금처럼만 해. 그것뿐입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