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양신학교 출신 박희천 한국 내수동교회 원로목사
북한 평양신학교 출신 박희천 한국 내수동교회 원로목사. 사진=내수동 교회.

12월 25일은 미국 등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하지만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며 기독교가 번창했던 평양과 북한은 국제 기독교단체들로부터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으로 지탄받고 있습니다. 북한 내 사실상 마지막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평양 인근에서 직접 목회를 했던 박희천 한국 내수동교회 원로목사는 VOA에, 한국전쟁 전후 북한에서 수많은 목사들이 순교했다며, 북한 주민들이 신앙의 자유를 되찾아 성탄절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 오길 고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24일 박 목사를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라디오
[인터뷰: 평양신학교 출신 박희천 목사] "북한인들 신앙의 자유 되찾길"

기자) 목사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향이 평남 순천이시군요.

박희천 목사) “네, 별로 유명한 곳은 아닙니다. 평양에서 120~130리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순천군이란 곳이요.”

기자) 과거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번성한 곳이었는데, 목사님이 북한에 계실 당시는 어땠나요?

박희천 목사) “제가 있을 때까지는 교회가 제대로 있었습니다. 제가 6·25 사변 중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6·25사변까지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교회가 아주 없을 겁니다. 공산당이 평양에 봉칠교회(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다고 하지만 저는 믿을 수 없고, 그 교회들은 순전히 전시용이지 신앙적인 교회라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기자) 1·4후퇴 때 남한으로 오셨다면, 적어도 전쟁 발발 후 1950년 말까지 북한에 계속 남아 계셨을 텐데, 기독교에 대한 북한 당국의 조치는 어땠나요?

박희천 목사) “공산당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기독교 아닙니까?  1949년도 6·25 사변이 나기 전 해지요. 공산당의 정책이 1949년도 12월까지는 평양 시내 목사들을 전부 다 가두고, 계획이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1950년도 1월에는 도청 소재지 목사들 잡아 가두고, 2월까지는 군청 소재지 목사, 3월까지는 면 소재지 목사, 4월까지는 리 소재지 목사, 계획이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이 터졌죠.”

기자) 체포된 성직자들은 어떻게 됐나요?

박희천 목사) “1949년도 12월까지 평양 시내 목사님들은 많이, 그것을 우리는 ‘증발’이라고 합니다. 증발! 알게 잡아가면 평이 안 좋으니까, 목사님들이 신방 다니고 외출할 때에 누구도 모르게 납치해 갑니다. 그렇게 잡아갔습니다.”

기자) 공산당에 체포돼 순교를 당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박희천 목사) “물론이죠. 그 당시 순교를 많이 했고요. 또 6·25 사변 때에 국군이 다시 (반격해) 이북으로 갔지만, 압록강까지 다 못 갔습니다. 평안북도 절반까지밖에 못 갔습니다. 그런데  공산당은 국군이 오면 자기들이 죽으니까. 공산당이 철수할 때에 자기 지역 내에 있는 목사들을 다 죽이고 철수했습니다. 그 바람에 목사님들이 많이 순교했죠.” 

기자) 공산당이 왜 그렇게 혹독하게 성직자들을 죽이고 탄압했나요?

박희천 목사) “사상이 다르지 않습니까? 공산주의는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상이니까. 사상적으로 대치되니까 보통 미워하는 게 아니고 사상적 원수이니까 기독교를 제일 싫어했죠.” 

기자) 월남하신 뒤에 평양의 신도들 상황은 들으셨나요?

박희천 목사) “저는 고저 1950년도 12월에 (남한으로) 내려왔으니까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평양신학교가 1949년도 12월에 공산당에 의해 폐쇄됐습니다. 제가 평양신학교에 49년도 12월까지 나갔거든요. 그런데 1949년도 12월 달에 공산당이 평양신학교를 폐쇄했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못 나갔죠.”

기자) 평양에 당시 신학교가 몇 개 있었나요?

박희천 목사) “평양신학교 하나죠. 평양신학교가 하나일뿐더러 해방 전까지는 한국 교회 북한과 남한을 통틀어서 제대로 된 신학교는 평양신학교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저는 평양신학교 졸업을 하지는 못했고 1년 반 동안 재학생이었죠. 학교 다니면서 교회를 섬겼죠. 그 때는 다 그랬습니다. 사차리 교회라고 평양에서 한 50리 떨어진 대동군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기자) 결국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은 핍박으로 사라져 갔고, 유엔 보고서와 국제 기독교단체들은 북한을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 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성직자로 계셨던 분으로서 마음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박희천 목사) “참 불쌍한 나라죠. 그저 지금 북한의 인민들 생각하면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있을 때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아마 사람다운 생활을 못 할 겁니다. 순전히 공산당의 기계라 할까? 순전히 공산당에 의해 움직이지 인간다운 생활을 못할 겁니다. 공산당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제가 있었을 때도 그랬어요. 반정부에 대한 말 한마디만 했다가 걸려들면 잡혀갑니다. 공산당 정보부에 잡혀가면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산 치하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벙어리가 되어야 해요. 말을 하다 보면 더러 실수할 수 있거든요. 실수해서 걸리면 끌려갑니다. 그래서 제가 있을 때도 말을 안 했습니다. 그저 벙어리로 살아요. 말을 하다 보면 실수하니까요. 그것이 공산당의 실체인데, 지금은 아마 이북 사람들이 전부 벙어리가 됐을 겁니다. 말하다 실수하면 죽습니다.”

북한 평양신학교 출신 박희천 내수동교회 원로목사가 90세에 펴낸 자서전. 이곳에 북한에서의 신앙 얘기도 담겨 있다.

기자) 그래서 결국 목사님도 피신 끝에 1·4 후퇴 때 탈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피난길이 쉽지 않으셨겠습니다. 

박희천 목사) “나는 이북에서 내려올 때 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피난 내려올 때 우리 가족 전체 30명이 같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짐을 지고 오려니까 어린아이들을 업고 올 수가 없어요. 어른들이 짐을 지고 와야 하니까. 그래서 4~5세 된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가니까 하루에 30리밖에 못 갑니다. 뒤에서 중공군의 대포 소리가 막 납니다. 중공군에게 추월당하면 가장 먼저 죽을 사람이 접니다. 이북에서 목회했으니까요. 그래서 가족과 의논해서 가족과 헤어져 나 혼자 총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후에 우리 어머니와 형님들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죠.”
 
기자) 그렇군요…그 후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곳 미국 등 지구촌의 많은 주민들은 25일,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예배도 드리는데, 탈북민들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성탄절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성탄절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박희천 목사) “네, 북한에 계신 인민들이여. 저도 625사변 때에 북한에 있다가 피난 내려온 사람입니다. 피난민이기 전에 북한에서 평양신학교에 다녔고 또 조그마한 교회를 맡아 목회했던 사람입니다. 성탄절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받을 벌을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받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가 됩니다. 그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 최고로 복된 날이죠.”

기자) 올해 연세가 94세이신데, 고향이 많이 그리우실 것 같습니다. 끝으로 성탄절을 맞아서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박희천 목사) “북한에 계신 인민 여러분! 저도 북한에서 온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얼마나 괴로움이 많으십니까? 제가 북한에 있었을 때도 말을 잘할 수 없었고, 말을 잘못하면 잡혀가니까 어려움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더 하시겠지요. 그러나 역사가 지남에 따라 세월이 바뀔 수 있습니다. 혹시나 앞으로 북한이 해방되어서 여러분들도 우리와 같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제가 바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멀지 않은 앞날에 여러분도 우리 남한같이 해방이 되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을 기대하시고 오늘의 고생을 잘 참아 견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자) 목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희천 목사) “네 고맙습니다.”

진행자) 성탄절을 맞아 북한 평양신학교 출신 박희천 목사와 함께 옛 북한의 기독교 상황과 성탄 의미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