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인권운동가를 위한 임시분향소가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마련된 가운데 조문객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지난 28일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인권운동가를 위한 임시분향소가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마련된 가운데 조문객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북한 관련 화제성 소식을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여생을 바쳤던 김복동 할머니가 92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워싱턴 한인사회도 빈소를 마련해놓고 고인을 삶을 기리고 명복을 빌었습니다. 장양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 28일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인권운동가를 위한 임시분향소가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마련된 가운데 조문객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지난 28일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인권운동가를 위한 임시분향소가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마련된 가운데 조문객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검은 머리 곱게 땋아내린 열 다섯 나이에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던 김복동 할머니.

[녹취: 김복동 할머니 증언 동영상] “일본서 처녀 강제모집이라 각 군 면마다 몇 십 명씩 모집을 해요. 내 나이가 만으로는 14살이고 우리 나이로는 15살이었고..”

김복동 할머니는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녹취: 김복동 할머니] “공장이라고 하는데 죽기야 하겠나 하고서 간 곳이 공장이 아니고 일본군을 상대하는 공장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된 김 할머니는 어떤 불행이 닥칠지 예상하지 못할만큼 어렸습니다. 

[녹취: 김복동 할머니] “근근히 목숨만 살아서 집에 오니까 나이가 22살이라 하더라고요. 8년이라 하는 세월로 암흑 속에서 근근이 목숨만 살아 돌아온 우리들이…”

암흑같던 8년의 세월은 9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둘때까지 80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놨습니다. 

과거에 대한 고통과 수치심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손주 재롱을 보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92년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처음 알린 후 김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변인으로서 일본 정부의 사과와 인정, 배상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인권운동가로 살았습니다. 

위안부 피해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생존자들에게 용기를 당부했습니다. 

이런 김 할머니의 행보는 한국사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녹취: 김복동 할머니] “일본 정부가 사죄할 때까지 우리 여려분께서 같이 협조해서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이 죽기 전에 사죄라도 받게 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암으로 투명하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할머니의 중요한 활동무대였던 미주 한인사회는 지난 28일 저녁 임시분향소를 마련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향 냄새가 그득한 분향소에는 ‘여성인권 운동가 고 김복동’이라는 문구 아래 팔을 높이 올려 환히 웃고 있는 고인의 사진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소녀상 모형과 나란히 놓였습니다. 워싱턴희망나비 조현숙 대표입니다.

[녹취: 김복동 할머니] “어제 저녁에 한국 윤미향 대표님한테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했고요, 호흡이 많이 곤란해지셔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고 저희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미국 시간 오전 9시 넘어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조 대표에 따르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분향소가 미주 한인사회에 마련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녹취: 조현숙 대표] “워싱턴을 직접 방문하셨던 분 중 한 분이시고 워낙 많은 일들을 나서서 하셨어요. 병상에서도 끝까지, 투사로서 끝까지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리더십이 있는 ..항상 버팀이 되셨던 분입니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총 238명 중 처음으로 증언한 김 할머니는 국제사회에 나서 목소리를 높였고, 이런 활동은 다른 피해자들에게 의미가 깊었다고 조 대표는 설명합니다. 

과거를 떠올리며 증언을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일을 피해 침묵의 세월을 살고 있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는 겁니다. 

워싱턴의 민간단체 워싱턴희망나비재단과 워싱턴 민주평화통일협의회가 마련한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할머니의 순결한 정신과 한인사회의 존경을 상징하는 하얀 장미로 고인을 기렸습니다. 
 
버지니아에 거주하는 20대 유학생 구본성 씨는 소원을 풀고 가지 못해 안타깝다는 심경을 말했습니다. 

[녹취: 구본성] “많은 피해를 보셨는데, 그거에 대한 좋은 결과를 이루지 못하고 병상에서 돌아가신 삶이 맘이 아팠고요, 생전에 남기셨던 많은 말씀에서 여자로서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못했던 한이라던지 인간으로서 사랑조차 나누지 못했던 삶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서… 동시에 (한국 내 피해자가 ) 23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른 나라에 북한을 포함해서 같이 연대해서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문객들은 생전의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의 소원을 나누며 남은 자들의 역할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조현숙] “어떻게 보면 워싱턴에서 더 열심히 해라 라는 계기를 주신 게 아닌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피해자로서 남는 게 아니고, 다른 피해 여성을 어루만지면서 하셨던 역할...”

또 다른 한인 여성은 평소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고인의 말을 되새겼습니다. 

[녹취: 한인 여성] “본인이 너무 힘든데 콩고 할머니 생각하고 전쟁 피해자 할머니 생각하고 기부도 하시고, 세상에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말을 하시고요,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카리스마 있으시며 맘에 딱딱 꽂는 말만 하세요. 90세 할머니가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조금이라고 보탬이 돼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이정실 회장은 “두려움 없이 주장하셨고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던 고인을 보며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배웠다”며 김복동 할머니의 일대기를 정리해 배포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주요 활동으로는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유엔 인권위원회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그리고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의 증언대에 선 일 등입니다. 

2012년에는 전쟁 중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을 위한 기부 모금인 ‘나비기금’을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이 회장이 배포한 일대기에 따르면 미국, 일본, 베트남, 독일 등 전쟁 피해를 입은 나라를 중심으로 각지를 돌며 피해 사실을 알렸던 김 할머니는 평소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본계 한국인 학생들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고 기금을 전달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이런 김 할머니의 활동에 주목했습니다. 

2015년 `AFP 통신'은 김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선정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시는 ‘용기있는 여성상’을 수여했습니다. 

뉴욕타임스'와 `NPR,' `블룸버그' 통신 등 미 주요 언론들은 김 할머니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가’로 소개하며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언급하며 당시 합의가 일본의 법적 책임 선언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존자들의 주장을 실었고,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합의로 세워진 재단을 폐쇄하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할머니들의 뜻에 어긋나는 합의를 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대통령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앞서 “당시 합의는 한-일 양국이 정상적인 교섭 과정을 거쳐 이뤄졌고 합의 과정에 문제가 없었던" 만큼, 이를 변경하려는 요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은 1일 서울주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고, 유해는 충남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됩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