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란민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란민들.

70년 전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고립무원이 될 뻔했던 운명의 순간에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탈출시킨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이 선박 일등항해사였던 러니 전 일등항해사는 “진정한 영웅은 한국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동현 기자가 당시 생생한 증언을 직접 들어봤습니다.

기자) 생애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차례 큰 전쟁을 겪으셨고 정전 이후 뉴욕주 해상민병대 (주방위군과 유사) 제독(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어떤 경위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 씨가 한국 전 당시 배 위에서 찍은 사진. 사진제공=로버트 러니.

러니 전 일등항해사) “저는 태평양전쟁 당시 17세 나이로 미군에 입대해 상륙부대의 일원이었고, 사이판 전투에도 참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운항하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로 복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화물 수송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에서 위기가 찾아왔고 대량 피난민이 발생하자, 흥남에 집결했습니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선장을 포함해 간부12명과 35명의 승조원으로 구성됐고 화물 1만t을 적재할 수 있는 무기 하나 없는 민간 화물선이었습니다. 현재 살아있는 승조원은 저를 포함해 3명 정도이고, 계속 긴밀히 소통하고 있습니다.”

기자) 당시 화물선에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한 배경에 대해서 말해주십시오

러니 전 일등항해사) “당시 레너드 P. 라루 선장 (2001년 10월 향년 87세 별세)의 인류애적인 신념이 작용했습니다. 라루 선장은 당시 수많은 인파가 자유를 갈구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후 유엔군의 피난민 후송 계획이 결정되자, 직접 손을 들고 자원했습니다. 그는 적대세력에 대해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돌이켜봤을 때 확실한 원칙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정전 이후에는 40여 년 동안 가톨릭 베네딕토회 성 바오로 수도원의 수사로 지내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봉헌했습니다. 당시 지나치게 과밀하게 될 사태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지만, 선장은 최대한 많이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우리는 어떤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모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 없이 명령을 따랐습니다. 진실성을 지닌 매우 훌륭한 선장이었고 최고의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피난민들이 철수하는 미군 상륙함에 오르고 있다.
흥남 철수 작전의 마지막 날이었던 1950년 12월 24일 흥남 부두를 촬영한 사진. 유엔군이 부두 시설과 배에 싣지 못한 보급품들을 폭파시켜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기자)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당시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을 태워 기네스 세계신기록에도 올랐습니다. 당시 현장 상황을 전해 주십시오

러니 전 일등항해사) “날씨는 매우 혹독했고, 적대세력들은 항구의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40만여 명의 연합군을 후송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 철수와도 유사한 면이 있었지만, 훨씬 더 성숙했습니다. 피난민들은 동요하지 않고 매우 침착했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한국민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승무원들이 한국말 “빨리 빨리”를 즉석에서 배워 한 명이라도 더 태울 수 있도록 다그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총 5 곳의 화물적재 구멍이 있었지만, 당초 승선용으로 설계된 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피난민들을 화물처럼 꾸역꾸역 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도 없었고, 통역관도 없었으며 식량과 물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방안은 모두 취했고,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은 모두 무사히 생존한 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기자)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머나먼 나라의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없었나요?

러니 전 일등항해사) “당시 제게 있어 한반도는 머나먼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전 참여 의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헌신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 망명 시절 오랫동안 몽골, 중국, 일본 등 외세에 핍박 받아온 한국민의 역사를 미국민들에게 알렸고, 저 역시 여러 차례 신문 등을 통해 익히 접했습니다. 그는 매우 설득력 있게 호소하는 연설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의 발언을 통해 한국민이 수 세기 동안의 외세 침입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정통성을 보존해왔고 자유를 지켜온 놀라운 민족인지를 깨닫게 됐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한반도의 자유를 강조하는 그의 헌신과 호소력이 미국민들의 마음에 전달됐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핍박의 역사에도 자유를 위해 투쟁해온 용감한 한국민을 위해 미국은 지속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1997년과 이듬해 미 국무부 요청으로 미군 실종자 유해 발굴 작업의 참관인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6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소회가 어떻셨습니까?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피란민 1만4천여 명을 탈출시킨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 씨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뉴욕주 해상민병대 제독이 됐다.

러니 전 일등항해사) “방북 당시 제 첫 인상은 북한 주민들이 공산정권 아래 매우 잘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법을 강구해 북한 내 여전히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지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당시 제가 만났던 북한 사람들 역시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했습니다만 그들이 항상 제게 강조한 대목은 공산정권 아래의 통일이었습니다. 흥남철수 당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채 이북에 남겨져야 했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됐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사람들 모두 자유를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솔직히 저도 명쾌한 답은 모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몸을 실었던 피난민의 아들 문재인 대통령을 최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매우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반도 전체의 안정과 안보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먼 훗날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달성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과정에서 대화와 만남은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 대통령에게 좋은 성과가 있길 희망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 기적의 주역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 로버트 러니 예비역 제독과의 인터뷰 였습니다. 인터뷰에 김동현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