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미 보훈부, 한국전 당시 아시아계 참전용사들 어려움 조명 


중국계 한국전쟁 참전용사 프랭클린 창 씨. (사진출처: 미국 보훈부 웹사이트)
중국계 한국전쟁 참전용사 프랭클린 창 씨. (사진출처: 미국 보훈부 웹사이트)

올해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은 가운데 미국 보훈부가 중국계 미국인 해병대 참전용사의 회고를 통해 소수계 병사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을 조명했습니다. 당시 차별과 선입견으로 인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소수계 참전용사들이 용감하게 싸웠다고 평가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보훈부가 최근 조명한 중국계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하와이주에 사는 올해 87살의 프랭클린 창 씨입니다.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중국계 이민자 2세인 창씨는 미 해병대 1사단 소속 소총수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돼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계 병사는 창 씨를 포함해 6명.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미군 병사들과는 다른 이례적인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창 씨는 당시 지휘관이 중국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로 자신이나 다른 중국계 전우들을 최전선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미 보훈부] “In a time when Chinese Americans often faced discrimination, Chang’s commander initially refused to send him or others to the front line.”

그러나 집요하게 지휘관을 설득해 최전선 산악지대의 중대에 합류해 용감하게 싸웠지만, 창 씨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당시 특수 상황과 외모 때문에 아군의 오인 사격을 받거나 공산군으로 오해를 받았다는 겁니다.

창 씨는 적군이 당시 열악한 보급품으로 인해 전사한 미 해병대원의 군복을 벗어 입었다며, 아군이 해병대원인 자신을 그런 적으로 오인해 사살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우려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미 보훈부는 또 창 씨와 중국계 동료들이 민간인으로 오해받아 군 급식대에서 쫓겨날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 보훈부] “The identity challenge even extended to the rear as the Chinese American Marines were at times confused for the Korean Service Corps members – civilians who wore U.S. uniforms and served the Marines by carrying food and ammunition.

당시 한국인 민간인들 중에 미군복을 입고 식량과 탄약을 해병대에 운반하는 일군들이 있었는데, 미군 급식 담당자들이 배식을 위해 줄을 선 창 씨를 그런 일군으로 오인해 쫓아내려 했다는 겁니다.

창 씨는 그런 상황을 유창한 영어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타개할 수 있었다고 말했고, 미 보훈부는 이런 어려움을 “이례적인 도전들”이라고 표현하며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보훈부는 미군 기관지인 ‘성조지’가 지난 6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프랭클린 창 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소수계 병사들이 전장에서 겪어야 했던 이런 특이한 일화들을 소개했습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성조지’는 당시 창 씨와 더불어 미 해병대 최초의 아시아계 장교로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에서 뛰어난 지도력으로 많은 대원들의 생명을 살린 커트 추엔 리 전 소령을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4년 타계한 리 전 소령은 과거 VOA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계란 이유로 통역장교로 배치된 데 항의해 전투장교로 자원했다고 회고했었습니다.

백인 사병들은 소수계 통역장교를 상관으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전투장교로 자원했고, 인종적 선입견을 품고 있던 부대원들은 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는 자신을 보며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당시 그의 부하였던 로날드 버브리스 씨는 미 공영방송 PBS에, 많은 장교들은 기관총조차 분해하지 못하면서 장교 대우를 바랐지만, 리 당시 중위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해 부하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미 국방부는 리 전 소령처럼 한국전쟁에서 이런 차별과 선입견을 극복하고 승리에 기여한 아시아계 미군 영웅들을 과거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대전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28개월간의 포로 생활을 견뎌내 미군 최고의 무공훈장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 히로시 미야무라 씨, 2차 세계대전 참전 뒤 제대한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자원입대해 중부 전선을 탈환해 지킨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 전 대령이 대표적입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5월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트위터’에 미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김영옥 대령은 소수 인종 최초로 미 육군 대대장에 임명된 인물”이라며 수천 명의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소개했었습니다.

미 국방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시아 태평양계 미군 규모를 당시 집계하지 않아 공식 규모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미 참전 전사자 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미군 전사자 3만 6천여 명 가운데 아·태계 전사자는 241명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미군 현역에 복무 중인 아시아·태평양계 미군 병사는 전체의 5.6%입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