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추석을 앞두고 한국의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서 합동 망향제를 열었다. (자료사진)
지난해 9월 추석을 앞두고 한국의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서 합동 망향제를 열었다. (자료사진)

미-북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이산가족 상봉에 기대를 걸었던 재미 이산가족들이 큰 실망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와 세 동생을 북한에 두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올해 86세의 김경수 전 아칸소대학 교수는 상봉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거의 접었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70년째 알 수 없는 가족의 생사 확인이라도 마지막으로 이뤄지길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김 전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지난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 미-북 정상회담을 보시면서 재미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기대도 크셨을 텐데,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경수 전 아칸소대학 교수.
김경수 전 아칸소대학 교수.

​​김경수 전 교수) 이루 표현할 수 없죠. 그런데 저는 (지도자들이) 이산가족을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기자) 지난 2월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재미 이차희 재미 이산가족 상봉 추진위원회 사무총장 등 한인사회 지도자들과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등 전직 고위 관리들, 일부 현직 의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함께 서한을 보냈었죠. 재미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꼭 제기해 달라고. 그때만 해도 좀 희망이 있었는데요.

김경수 전 교수) 그렇죠. 이차희 선생이 나한테도 이메일을 보내고 그래서 희망을 가졌었죠. 그런데 지금은 아주 포기했어요. 제 막내 동생이 1949년에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전쟁 1년 전에. 내가 생일까지 기억합니다. 3월 3일! 우리 어머니가 40세에 낳았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이북에 살아있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제가 어떡해 해서든지 알고 싶은 것은 생사확인! 그런데 그 생사확인이 될 수 있겠어요? (한숨)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 가족과는 어떻게 헤어지셨나요?

김경수 전 교수) 저는 1950년 12월에 중공군 때문에 우리가 후퇴할 때 미국에서 우리 원산항에 2척의 큰 배를 보냈어요. 그때 원산 시민이 10만여 명이 됐는데 부두에 나와서 배를 타려고 해변가에 나와 아우성이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몰려서 17살이었던 나도 거기에 휩쓸리고 말았어요. 그러다 바다에 빠지고 말았어요. 12월 그 추운 겨울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의 목을 잡아끌어 올리더라고요. 그 사람이 미군인데 나를 배에 태워 부엌에 따뜻한 곳에 내려놓고 자기 옷을 덮어주고 여기 있으라고. 그래서 그 배를 탈 수 있었어요. 그분 이름이 미스터 윌리엄스. 나를 끌어준 사람 이름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거기서 배를 타고 부산에 내려왔죠.

기자) 그럼 북한에는 어머니와 동생 3명, 한국에는 의사셨던 아버지와 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형과 누나, 김 교수님 이렇게 가족이 각각 4명씩 생이별을 한 거군요.

김경수 전 교수) 그렇습니다.

기자) 한국에 내려오셔서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경수 전 교수) 제일 걱정이 된 게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 셋인데, 가족을 상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죠. 저는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때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습니다. 공부하고 학위를 마치고 여기서 교수를 40년 가까이 하다가 지금은 은퇴를 했습니다. 그동안 북한의 가족을 찾기 위해 보스턴이나 캐나다, 뉴욕 이런 곳에서 재미이산가족 상봉 단체를 통해 찾으려고 여러 노력을 했고요. 중국에서 있었던 학회에 갔다가 이북 대사관까지 찾아가 우리 가족을 찾으려고 여러 노력을 했었습니다.

기자) 하지만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김경수 전 교수)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 한국 TV에 제 사연이 방송된 뒤 중국에서 여러 번 전화와 이메일 접촉이 있었는데 돈만 요구하고 거의 사기에 가까웠었습니다.)

기자) 아버님이 군의관으로 북한군에 강제 입대했다가 남한 지역에서 탈출해 극적으로 김 교수님을 부산에서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도 어머님과 동생들을 많이 그리워하셨을 것 같습니다.

김경수 전 교수) 네, 그런데 이제 아버님도 돌아가셨고 형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형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어요. 나중에 어머님과 동생들을 가서 만나게 되면 살아갈 기반을 닦아야 한다며 돈을 남기고 돌아가셨어요.

기자) 고향인 원산의 주소를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김 전 교수) 그럼요. 원산시 석우리 189번지! 바로 원산 역전의 큰 이층집입니다. 이름이 백수여관! 그게 우리 집이었어요. 건물 일부를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한테 임대했어요. 제 어머니 이름은 이순임, 첫째 여동생은 김의수, 둘째 여동생은 김은수, 막내 남동생은 김희수입니다. 그걸 내가 프린트 많이 해서 가지고 다녔어요. 중국에 갔을 때도 그걸 가져가서 이북대사관에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기자) 그동안 재미 이산가족 단체나 일부 의원들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미 정부에 촉구를 했었는데, 아직 한 번도 상봉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가족이 섭섭해했을 것 같습니다.

김경수 전 교수) 그렇죠 섭섭한 마음이 있죠. 그런데 바람이 있다면 미국 정부가 재미 이산가족을 (북한의 가족과) 만나게 해 달라고 그것을 이북이 거부 못 할 만큼 강하게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제일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기자) 아직도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데, 이 상황에서 교수님이 간절히 바라시는 게 있다면?

김경수 전 교수) 생사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상황에 따라 우리가 북한에 간다는 것은 힘들 것 같고. 또 김정은이 지금 러시아에 가 있잖아요. 그래서 김정은이 우리 이산가족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솔직히 기대하기 힘들고요. 그래도 어떡하든 이산가족을 담당하는 이북 관리들을 통해서라도 생사! 죽었는지 살이 있는지만 알아도 좋겠어요. 지금 우리 나이가 이런데, 우리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셨을 것이고 내 동생도 80이 가까워 오는데, 70이 다 넘고. 그런데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살아있다고만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집을 팔아서라도 가야죠. 우리 형님이 남겨둔 돈도 있고.

기자) 북한에 있는 동생들이 이 방송을 듣고 있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김경수 전 교수) (한숨을 쉬며) 어이구 어떠해서든지 내가 너희를 보고 싶듯이 너희도 나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니까 끝까지 살아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우리들이 서로 만날 때까지 살아라!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런 말을 꼭 하고 싶어요. 

강원도 원산 출신의 재미 이산가족인 김경수 전 아칸소 대학 교수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연을 들어 봤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