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정원식 당시 한국 국무총리(오른쪽)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지난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정원식 당시 한국 국무총리(오른쪽)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1992년 남북한이 합의했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미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여러 인터뷰에서 이 공동선언의 비핵화 조건을 강조했기 때문인데요. 선언이 북한 비핵화의 이정표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엇갈렸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볼튼 보좌관은 지난 29일 미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의 증거를 언급하며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볼튼 보좌관] “And at 1992, the joint North-South denuclearization agreement had North Korea pledging to give up any aspect of nuclear weapons…”

북한 정권이 지난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모든 핵무기 개발과 우라늄 농축, 플루토늄 재처리 등을 포기하기로 약속한 점을 강조한 겁니다.

볼튼 보좌관은 같은 날 ‘CBS’방송에도 북한의 핵 포기 전에는 어떤 양보도 없을 것이라며 다시 92년 북한이 포괄적으로 결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 과정에서 92년 공동선언이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부 당국자도 지난해 “모든 남북한의 큰 틀은 남북이 평화롭게 번영해 통일을 지향하는 것인데,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이 틀이 깨졌다”며 “북한이 (남북간 합의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부터 지켜나가는 게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했었습니다. 

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서문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 방안을 6개 항에 걸쳐 자세히 담고 있습니다. 

서문에는 한반도 비핵화로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 조성, 아시아와 세계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란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1항에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고, 3항에는 핵 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가 선정해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해 남북핵통제 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1991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발표한 뒤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해 그 해 12월에 합의했고1992년 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발효됐습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협상 전 핵무기뿐 아니라 생·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가 없는 평화적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노태우 대통령] “나는 우리의 평화 의지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고 화학·생물 무기를 이 땅에서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볼튼 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강조한 생·화학무기 등도 미북 협상에서 논의해야 한다면서도 핵 사안은 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1994년 제네바 미북 핵합의를 이끌었던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특사는 30일 VOA에 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비핵화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갈루치 전 특사] “The 1992 declaration on denuclearization is a very useful document in South Korea and United States perspectives, because it commits both North and South to foursquare not only nuclear weapons but any fissile material productions.

이 선언이 남북한의 핵무기는 물론 핵 물질, 즉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 생산 역량까지 제한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국과 미국 모두에 매우 유용한 문서라는 겁니다. 

갈루치 전 특사는 한국에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이 모두 없지만, 북한은 두 시설이 모두 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근거해 이를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국제사찰은 물론 남북한 상호사찰까지 포함하는 등 아주 명확하고 포괄적인 비핵화를 담고 있는 것도 매력으로 뽑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92년 당시와 달리 핵보유국 입장에서 군축을 시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 협상의 한국측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이동복 전 안기부장 특보는 지난주 VOA에 북한의 이런 접근이 당시 협상에서 북측이 고수하던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아주 비슷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이동복 전 특보] “두 안은 내용이 아주 달라요. 비핵화는 핵을 안 가지고 있는 쪽이 핵을 갖지 않는 것이 비핵화이고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컨셉이죠. '비핵지대화'는 핵을 가지고 있는 쪽이 특정한 지역을 지정해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거나 도입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는 게 비핵지대화에요. 이 두 개가 붙었는데, 그 때 제가 (당시 협상에 나온) 김영철과 굉장히 싸웠어요.”

92년 공동선언은 북한이 진통 끝에 이런 ‘비핵지대화’ 입장을 접고 비핵화로 통일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북한이 핵보유국으로서 오로지 ‘비핵지대화’ 차원에서만 논의하겠다는 게 북한의 입장이란 겁니다. 

북한은 이미 지난 2003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핵 압살 책동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백지화됐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 전 특보가 언급한 김영철 당시 북측 실무자겸 인민군 소장이 현재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대외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비핵지대화’ 주장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임종석 한국 청와대 비서실장도 4·27남북정상회담 전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 능력이 1990년대와 달라졌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었습니다.

[녹취: 임종석 비서실장] “북한의 핵과 ICBM이 고도로 집중된, 고도로 발전한 이 시점에 비핵화 합의를 한다는 것은 1990년대 초, 그리고 2000년대 초에 이루어진 비핵화 합의와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이 이번 회담을 어렵게 하는 점입니다.”

6자회담 미국측 대표로 9·19 공동성명을 이끌었던 크리스 힐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이 때문에 1일 VOA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김정은이 여태까지 말한 모든 게 과거에도 접했던 말이고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비핵화의 이정표로 속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4·27 판문점 선언의 비핵화 합의문이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는 지적도 회의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악관에서 미북정상회담 준비를 주도하는 볼튼 보좌관이 직접 92년 선언을 여러 번 강조했고 당시 한반도 비핵화 선언 협상의 북한측 실무자였던 김영철이 현재 대외 협상을 주도하는 점을 볼 때 북한이 이 카드를 먼저 꺼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이 때문에 미 법무부와 국방부, 국무부, 유엔 대사로도 활동했던 베테랑 국제전문가인 볼튼 보좌관과 북한의 대표적인 대외협상 전문가인 김영철 부장의 물밑 기 싸움이 미북정상회담 전까지 아주 치열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와 관련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의 남측 실무자 중 한 명으로 김영철을 자주 상대했었던 한용섭 한국 국방대학교 교수는 한국 '조선일보'에 김영철 부장이 말장난이 심하다며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김영철은 옛날부터 주도면밀하고 표리부동한 사람”, “겉과 속이 정말 다른 사람”으로 핵을 만들면서도 핵을 만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고, 회담장에서도 서슴없이 말장난을 해왔기 때문에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