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5년 독일에 거주하던 중 북한으로 넘어갔다 요덕 수용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진 신숙자 씨와 두 딸을 남측으로 송환하려는 운동이 한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민간 차원의 서명운동에 이어 신 씨 모녀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최근 한국 국회에 제출됐습니다. 한국의 통일부와 국가인권위원회도 신 씨 송환 문제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신 씨와 함께 북한에 갔다 1986년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탈북한 남편 오길남 씨를 전화로 연결해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문) 1980년대에 독일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떻게 하다가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셨나요?

답) 1985년에만 하더라도 저는 한국에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같은 것도 일부분 저희 형님 댁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85년 중반부터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사무청사, 사무청사는 대남공작사업부를 지칭해서 하는 얘깁니다. 거기의 유인공작에 말려들어서 가족을 대동하고 입북을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저희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 저에게 양심에 어긋나는 그런 지시를, 지령을 줄 줄은 몰랐습니다.

문) 처음에는 어떤 조건으로 박사님을 회유했던 건가요? 북한에서요.

답) 그 당시에는 경제학자로서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좋다. 나는 그 당시에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도 개혁개방을 하고 있었고 북한도 개방 쪽으로 선회할 것이라고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시를 받고 그들의 요청에 응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입북을 했던 것입니다.

문) 네, 그러면 북한에 가셔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고 또 왜 탈북하게 됐습니까?

답) 저와 제 집사람 신숙자를 남한 말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북한은 대남방송, 즉 ‘구국의 소리’ 방송국에 저희를 배치시켜서 대남방송을 하도록 했었습니다.

문)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홀로 탈북을 하시게 된 거죠?

답) 그러던 중에 갑자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저를 소환했습니다. 대외연락부, 나중에 사회문화부라고 하기도 했는데, 거기 이창선이라는 대외연락부장을 만났습니다. 흥부초대소라는 데서요. 그래서 저한테 덴마크로 나가서, 덴마크 주재 북한대사관저를 거점으로 해서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학생 두 사람을 어떻게 해서라도 유인해서 덴마크로 불러들여라, 덴마크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북한 공작대원이 먼저 20여 명이 나오고 나중에 한 50여 명이 덴마크 코펜하겐에 들어왔었습니다. 그걸 나중에 덴마크 당국이 저에게 얘기해 줬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고.

문) 그런데 북한의 지령을 어기시고 탈북을 하신 거군요?

답) 네, 그 때 준비는 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집사람도 말했습니다. 내게 이런 일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시킨다, 참 고통스럽다, 이 일을 수행해야, 이 과업을 수행해야 저 어린 두 딸과 가족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나가라, 덴마크에 가는 도중에 어떻게 해서라도 공작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일로 다시 돌아가서 자기와 딸 둘을 빼내도록 노력해 보라, 그렇게 했었습니다.

문) 아무튼 그렇게 해서 홀로 탈북을 하게 되셨고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북한에 남겨놓게 되셨는데. 그게 1986년이니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요. 그 동안 박사님께서 가족의 생존을 확인하시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온 걸로 아는데. 가족의 소식을 들으셨나요?

답) 독일에 있을 때, 한 5년 동안 있으면서 노력했죠. 그래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영국 런던의 시크리 테리엇 사무총장이 평양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들어가서 북한 외무성에, 저의 아내와 딸 둘과 면담하고 싶다, 좀 시켜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에서는 저의 아내가 면담하는 걸 거절한다고 통보했대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측에서는 더 요구를 관철시킬 수 없어 그냥 돌아왔죠. 서울에 들러 제게 사정을 얘기해 줬습니다, 참 어렵다는 걸.

문) 그리고 나중에 요덕수용소에 아내와 두 딸이 있다는 사진을 전달을 받으셨죠?

답) 네, 그렇습니다. 그것은 91년입니다. 91년 아마 1월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자 윤이상 씨가 북한에 있는 별장에 갔을 땐데요, 김일성과 김정일이 윤이상 씨한테 별장을 하나 마련해 줬던 거죠. 거기서 휴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마 북한 공작수뇌부와 여러 가지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흑백사진 6장과 아내와 두 딸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테이프를 제게 전해 주었습니다. 당신 집사람과 딸들이 살아있지 않느냐, 돌아가거라. 나는, 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윤이상 씨가 솔직하게 말해서 저에게 온갖 공갈협박을 다 했습니다. 미제의 고용간첩이라느니, 심지어 저를 미제의 고용간첩이라고 몰았습니다.

문) 그게 91년이고요. 20년이 지났는데요. 지금도 가족들이 살아계신 걸로 믿고 송환 노력을 하고 계신 거죠?

답) 제가 한다기 보다는 내 사정을 딱하게 본 주변 사람들이 송환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서울에는 ‘세이지 코리아’라고, 젊은 여성들로 이뤄진 단체가 가장 적극적이고요. 저희 집사람의 고향인 통영에서 황수열 목사와 사모님, 그리고 제 아내의 학교 동기동창들이 주축이 되어서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산 쪽에 다녀왔습니다.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문) 지금 말씀하신 게 민간 차원의 송환 운동이고요, 아내와 따님 두 분을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는. 그리고 그 동안 한국 정부 차원의 송환 노력이 있었는지 궁금하고요, 또 한 가지, 최근에 한국의 신임 통일부 장관이 아내 분의 송환을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분위기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떠십니까?

답) 우리 정부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의 아내와 두 딸을 품에 안고 울어보고 싶다는 그 마음을, 그 소망을, 그 소망이 우리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김정일 정권, 그러니까 정권이라 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 인간을, 인권을 그렇게 탄압하는 그런 범죄집단한테 어떻게 우리 정부가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한다고 한들 뚜렷한 성과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통영에서 방수열 목사와 그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하는 서명 운동, 그걸 UN 사무총장에게 보내서, UN 인권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뤄주는 국제적 압력이 오히려 더 중요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에게는 내 자신 스스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문) 마지막으로요. 저희 방송이 지금 북한으로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북한 당국에 직접 전달하실 메시지나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가족들에게라도요?

답) 북한 당국에 여성들을 인질로 삼아서, 그것도 한 1년이면 모르지만, 4분의 1세기, 즉 25년이나 되도록 그렇게 인질로 잡아둘 필요가 있느냐? 도대체 뭐가 있느냐? 세상 좀 알고 아내와 두 딸을 제게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저는 이렇게 북한 당국에, 또 김정일에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진행자) 지금까지 지난 1986년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북한을 탈출한 오길남 씨로부터 가족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