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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남북전쟁의 영웅,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인물 아메리카] 남북전쟁의 영웅,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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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그랜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내전이었던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사령관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역 후에는 제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율리시스 그랜트는 1822년 4월 27일, 미국 중서부 오하이오 주 포인트 플레선트(Point Pleasant) 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히람 율리시스 그랜트(Hiram Ulysses Grant)였습니다. 아버지 제시 루트 그랜트(Jesse Root Grant)와 어머니 해나 심슨(Hannah Simpson Grant)의 3남매 중 장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죽 가공업을 하는 사업가였습니다.

어렸을 적 율리시스는 비교적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십대 시절에도 별다른 특징이 없고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뛰어난 말 달리기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율리시스가 17살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육군사관학교, 즉 웨스트 포인트에 보냈습니다. 사관학교에서도 그랜트는 그다지 눈에 띄는 생도가 아니었습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고, 자주 복장 불량, 지각 등으로 벌점을 받았습니다. 사관학교는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수학, 지리 등은 양호했습니다. 특히 기마술은 뛰어났습니다.

그는 1843년 39명중 21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랜트는 의무 복무기간 4년을 마치면 군 생활을 그만 둘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위로 임관된 그랜트는 세인트루이스 주 미조리에 있는 부대로 배치됐습니다.

당시 미국은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랜트는 병참장교를 거쳐 중대장으로 승진하고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총탄이 쏟아지는데서도 용감하게 싸워 지휘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랜트는 그 전쟁이 노예제 지역을 늘리기 위한 목적일 뿐, 옳지못한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랜트는 이 동안 줄리아 덴트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네 자녀를 두었습니다. 1852년 그랜트는 워싱턴 주 뱅쿠버 포트에 배치됐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살게되면서 그랜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1853년 대위로 진급한 그랜트는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에 있는 포트 험볼트로 배치되고 그 기지의 지휘관이 됐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그는 과음 혐의로 처벌을 받고 군에서 제대했습니다.

미조리로 돌아온 그랜트는 장인의 땅을 얻어 농사를 지었지만 몇년 안가 농장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부동산 거래도 시도했지만 제대로 되지 못했고, 센트루이스에서 기술자나 사무원으로 취직을 하려 했으나 받아주는데가 없었습니다. 그랜트는 가족을 위해 길거리에서 장작을 팔기도 했습니다. 갈데가 없어진 그는 결국 아버지가 하는 피혁회사에 들어가 두 동생의 감독을 받으며 경리로 일을 했습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애국심이 발동한 그랜트는 다시 군대에 지원해 제 21 일리노이 의용군 연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이 연대는 전혀 훈련이 안된 조직이었지만 그랜트는 철저한 훈련으로 이를 정예부대로 만들었습니다.

1862년 2월 그랜트는 노예 문제로 양분돼 있는 켄터키 주에서 해군과의 합동작전으로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 기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두 기지 쟁탈전은 그때까지 북군이 처음으로 남군에 승리다운 승리를 올린 싸움이었습니다. 이 전공으로 그랜트는 의용군 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1862년 그랜트 소장은 적군 지역인 테네시주로 잠입했습니다. 이어 실로우 전투로 알려진 충돌은 남북 전쟁 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싸움 중 하나가 됐습니다. 공격과 후퇴가 반복되는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증원군의 지원을 받은 그랜트는 어렵게 최후 승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희생이 많아 그랜트는 군과 의회로부터 큰 비판과 함께 조사를 받았습니다. 한때 강등까지 됐지만 링컨 대통령의 지지로 그랜트는 다시 복직이 됐습니다.

남군 세력을 미시시피 강을 따라 둘로 쪼게 놓으려는 북군 전략에 따라 그랜트 장군은 1862년 12월 남군 요지 빅스버그를 공격했습니다. 다음해 7월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결국 그랜트 장군은 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1863년 10월 그랜트 장군은 테네시 주의 차타누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북군이 이들 전투에서 승리하자 남군은 조지아

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성장군으로 승진한 그랜트 장군은 중부 전선을 윌리암 셔먼 장군에게 맡기고 동부 버지니아 전선으로 갔습니다.

그랜트 장군의 대부분 선임자들은 전투의 목적을 지역을 점령하는데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랜트 장군은 지역보다는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 전쟁의 승리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의 북 버지니아 군을 추적하고 궤멸시켜야 했습니다.

1864년 3월부터 1865년 4월까지 그랜트 장군은 끈질기게 리 장군을 추격하면서 남군 병력에 재기 불능의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습니다. 보급 물자가 바닥난 남군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습니다.

남군 병력은 5만 5천에 불과한 반면, 이를 포위를 하고 있는 북군 병력은 12만 5천에 달했습니다. 로버트 리 남군 사령관은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희생자만 낼뿐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865년 4월 9일,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에 항복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버지니아의 어파머톡스 코트하우스 라는 마을 부근의 한 농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랜트 장군은 항복 의사를

확인한 다음, 리 장군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장군의 상징인 군도를 압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리 장군 부대원 한 사람도 포로로 잡지 않고, 모두 말을 가진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굶주리고 지친 남군 패잔병들을 위해 식량을 보내주었습니다.

북군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축포를 터뜨리자 그랜트 장군은 즉각 그것을 중단하도록 명령하고 “반군도 우리의 동포다. 우리는 남군의 패배를 축하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식 항복문서는 4월 12일에 서명됐습니다. 그 후에도 남부 연맹군의 항전이 이곳 저곳에서 벌어졌지만 리 장군의 항복은 사실상 처절했던 남북전쟁의 종말을 고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진행되는 동안 그랜트 장군은 군의 재건 사업을 지휘했습니다.

1868년 그랜트 장군은 제 18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백악관 입성은 그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46세의 최연소 대통령에게는 정치 또한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재임 중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헌법 제 15 수정조항의 비준이라든가, 법무부, 국립공원국 신설 등 성공적인 업적도 있었습니다.

그랜트 대통령은 꼼꼼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임명한 정부 요직 인사들 중에는 믿지 못할 성품을 지닌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1, 2 차 임기 내내 잘못된 인선으로 각종 부정 부패 사건이 일어나 그의 명성을 크게 훼손했습니다.

백악관을 물러난 후 그랜트 대통령은 다시 한번 평민으로서의 삶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그랜트 앤드 와드라는 금융회사를 시작했지만 동업자가 자금을 횡령해 회사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랜트 대통령의 불운은 계속됐습니다. 회사가 망하고 난 후 그는 후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군으로부터 연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랜트는 여전히 돈에 쪼들렸습니다.

그랜트 대통령은 빚을 갚기위해 잡지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친구인 마크 트웨인과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두권으로 나온 그의 회고록은 약 30만권이나 팔릴만큼 인기가 높았고,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명 저서가 됐습니다.

회고록은 약 45만 달러, 요즈음 가치로 천 160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가족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율리시스 그랜트는 1885년 7월 23일, 책이 출판되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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