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새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 (1)

2020.7.17 12: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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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새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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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새로운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대농장과 저택이 있는 버지니아주의 몬티첼로에는 그가 손수 설계하고 비문을 지은 묘소가 있습니다. 비문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종교의 자유를 위한 버지니아 법을 제정했으며,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한 토머스 제퍼슨. 1743년 4월 2일 출생-1826년 7월 4일 사망”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수없이 많지만 제퍼슨은 위의 세 가지 내용 외에는 단 한자도 더 넣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그 세 가지야말로 오직 제퍼슨만이 이루어 놓은 역사적 업적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1743년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 6녀 중 세째였지만 아들로서는 첫째였습니다. 아버지 피터 제퍼슨은 대지주였습니다. 피터 제퍼슨은 성공적인 농장주이자 측량기사였습니다. 또 보안관도 지냈고, 버지니아주 의원도 역임했습니다. 어머니 제인 랜돌프 여사는 동부 지역 명문 집안 출신 여성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다른 농장 지역의 아이들처럼 말 타고, 사냥하고 낚시를 즐기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토머스에게  읽기, 쓰기, 농장의 회계 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도 배웠습니다. 토머스는 바이올린도 배웠습니다. 그로 인해 토머스는 열렬한 음악 애호가가 됐습니다. 

불행히도 토머스가 14살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남인 토머스 제퍼슨은 약 5천ac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제퍼슨은 대지와 함께 수십 명의 노예도 물려받았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17살 때 미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윌리엄&메리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항상 책을 항상 들고 다녔고 예리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습니다. 하루에 15시간씩 공부를 한 날도 허다했습니다. 대학을 마친 후에는 버지니아의 저명한 법률가로부터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제퍼슨은 25세 때 산꼭대기에 몬티첼로라 불리는 대 저택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에 걸쳐 정원과 각종 생활 공간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 건축물은 초기 미국의 복고풍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몬티첼로는 제퍼슨이 설계한 여러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제퍼슨은 여러 연방정부 건물을 설계하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떤 건축가는 토머스 제퍼슨을 미국 건축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9세 때 마사 웨일스 스켈턴과 결혼한 제퍼슨은 그때부터 몬티첼로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여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란 자녀는 마사와 매리 두 딸 뿐이었습니다. 부인 마사는 여러 차례 임신과 출산으로 허약해졌으며, 결국 결혼 10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망요인은 산후 합병증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퍼슨은 ‘내 인생의 동반자가 사라졌다’며 슬퍼했습니다. 제퍼슨은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제퍼슨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버지니아주 의원에 선출되면서부터였습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을 논의하는 13개 주 대표 회의, 즉  1774년 제1차 대륙회의에 나갈 버지니아주 대표의 입장문을 작성하면서 뛰어난 정치인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권리에 대한 요약’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제퍼슨은 과감하게 영국 왕 조지 3세에 대해 ‘인민의 수석 대표 이상의 존재가 아니며, 정부라는 커다란 기구가 작동하도록 돕는 자일 뿐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제퍼슨은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으로부터 버지니아가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은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제2차 대륙회의에 나간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제퍼슨은 드디어 식민지 주들의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제퍼슨이 작성한 초안은 모든 인간은 재산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권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정부가 준 것이 아니며, 정부는 인민의 공복이지 지배자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정부의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나오며 어떤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라고 못 박았습니다.  

선언서는 또, 연합한 아메리카 나라들, 즉 United States of America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영국의 왕권에 대한 모든 충성의 의무를 벗으며, 대영제국과의 모든 정치적 관계는 완전히 해소돼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제퍼슨은 선언서가 담고 있는 원칙들이 모두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또 계속 도전을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신생국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776년 대륙회의를 떠난 제퍼슨은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와  주 의회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 식민지 각주는 영국의 국교를 정식 종교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립 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 중 하나가 국가와 종교의 분리였습니다. 이로써 신생 미국은 서방세계에서는 맨 먼저  정교분리 정책을 채택한 것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해 버지니아의 종교 자유령을 주장했습니다. 그러한 시도에 대해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이 강력한 반대를 벌였으나 격렬한 토론 끝에 1786년 결국 자유령은 통과됐습니다.  

종교 자유령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지배해 자기들의 견해와 사고방식만이 진실하고 오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여기고,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거짓 종교이며, 자신의 견해를 남에게 전파하기 위해 헌금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죄악이자 횡포라고 선언했습니다. 제퍼슨은 이 법령을 자신의 가장 두드러진 기여의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버지니아 종교 자유령은 미국 밖으로도 널리 전파돼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1779년부터 1781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했습니다. 제퍼슨이 주지사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영국군과 식민지 군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781년 6월, 영국군은 당시의 주 정부 청사가 있는 리치먼드를 기습했습니다. 제퍼슨은 영국군이 들이닥치기 직전 간신히 리치먼드를 빠져나가 화를 면했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주지사이면서 도망을 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제퍼슨의 정치적 미래도 불투명해졌습니다. 제퍼슨은 다시 버지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했고 잠시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1784년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뒤를 이어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면서 공직 생활을 재개합니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제퍼슨은 미국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분쟁에 휩쓸리지 않고 고립주의 정책을 유지하도록 외교관의 슬기를 발휘했습니다. 

이때 제퍼슨은 파리의 사회적 엘리트,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동시에 열심히 유럽문화를 배우고, 서적, 씨앗, 묘목 등을 몬티첼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건축설계, 미술품, 가구, 과학기재, 각종 정보도 함께 보냈습니다.  

1790년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제퍼슨은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됐습니다. 국무장관 시절 그는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과 많은 갈등을 빚었습니다.  

연방당원인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존 애덤스 부통령과 함께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많은 권한을 가진 대통령과 사법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들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식민지의 각 주가 보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정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96년 제퍼슨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러나 선거인단 표결에서 단 3표 차이로 존 애담스에게 패했습니다. 애덤스 신임 대통령은 제퍼슨을 부통령으로 임명했습니다. 애덤스 대통령과 제퍼슨 부통령은 서로 다른 정치 노선으로 계속 갈등을 빚었습니다. 4년 후 제퍼슨은 다시 대선에 나가 접전끝에 존 애덤스를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토머스 제퍼슨은 드디어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