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도산 안창호 장녀 / 아시안 첫 미 해군장교, 수전 안 커디

2021.5.14 12: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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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도산 안창호 장녀 / 아시안 첫 미 해군장교, 수전 안 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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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방부는 2021년 5월 아시아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미 해군의 첫 아시아계 여성 장교이자 최초의 여성 항공 포병 교관인 수전 안 여사를 대표적인 아시안으로 선정했습니다. 국방부는 웹사이트를 통해 안 여사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도와 한국의 해방을 위해 애썼고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 나아갈 길을 닦는데도 기여했다고 밝혔습니다. 

국방부는 수전 안 여사를 소개하는 동영상에서 2차 세계대전 중 약 35만 명의 여성이 미군에 복무했고 이 가운데 25% 정도가 해군에 복무했다고 밝혔습니다. 동영상은 이어 모든 여군들을 기억해야 하지만 특히 이번엔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해군이자, 미국 여성 최초의 항공 포격술 장교인 수잔 안 커디 여사를 조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수전 안은 1915년 캘리포니아 주 로스 엔젤레서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헬렌 리 여사 사이에서 5남매 중 큰 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는 오빠가 두명,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수전의 부모는 1902년 미국으로 이민 온 최초의 한국인 부부였습니다. 

도산 선생 부부는 힘든 이민 생활 중에도 일본의 압제하에 있는 모국의 독립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흥사단을 조직했습니다. 

수전의 집은 흥사단의 캘리포니아 지부처럼 사용됐습니다. 또 미국 내 한인들의 권익옹호, 언론활동, 교민 사회단결과 사회활동 지원 등을 위한 센터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버지 도산은 미국, 한국, 중국 상하이 등을 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도산은 수전이 11살때인 1926년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이 돼 미국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산은 수전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을 잊지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도산은 고국에서 일제에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극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8년 사망했습니다. 수전은 항상 고국의 독립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부모 밑에서 자신의 역할과 가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됐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수전은 어렸을 때도 아버지와 관련된 독립운동 단체의 일손을 도왔습니다. 

수전은 로스 엔젤레스의 뷰드리 초등학교, 센트럴 중학교, 벨몬트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수전은 야구, 필드하키 등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로스 엔젤레스 시티 칼레지에 다닐 때는 학교 야구 팀 주장에 2루수를 맡기도 했습니다. 대학 농구팀 선수로도 활약했고 소프트 볼도 했습니다. 

수전 안은 1940년 샌디에고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1942년에 해군에 지원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직후였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미국에 충성하는 일이기도 하고 부모님들이  평생을 바친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고 수전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군에서는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일본과 전쟁 중이어서 미국 안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이 높았고 군대에서는 성 차별이 심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수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지원해 결국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수전은 미국 동부 매사츄세츠 주 노스햄턴에 있는 스미스 대학에서 해군 후보생 과정을 이수하고, 아시아 계 최초의 미국 해군 장병이 됐습니다. 

해군에 들어간 후 능력을 인정받은 수전은 1943년 미 해군 최초의 여성 장교가 됐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여성 항공 포격술 교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즉  가상 조종실을 이용해 파일러트들이 비행 중 어떻게 적기를 격추시키는가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남자들도 다루기 어려운  훈련이었고, 1미터 50센티의 왜소한 동양 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떤 백인 남성 파일럿트는 동양 여자로부터 교육 받기를 거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전은 “당신이 하늘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가 하라는대로 총을 쏘라” 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수전 안은 1956년 공식적으로는 군에서 제대했으나, 미 해군 정보대를 거쳐 국회 도서관에서 일했습니다. 그 후에는 국가안보국에서 정보분석관으로 일했습니다. 냉전 시대에는 안보국 싱크탱크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소련국에서 일하는 300명의 요원들을 지휘했습니다. 

수전 안은 국가안보국의 지원으로 1956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도 했습니다. 그후에는 국방부를 비롯한 여러 관련 부서에서 1959년까지 많은 수의 극비 국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미 국방부는 오늘날 까지도 수전 안이 완성했던 프로젝트들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수전 안은 개척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편견,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었습니다. 

1947년 4월 수전은 아이랜드 계 해군 정보분석관 프랜시스 X 커디 (Francis X. "Frank" Cuddy)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의 결혼은 타인종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여러 주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버지니아 주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도 그 결혼을 반대해 5년 동안이나 수전과의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유일하게 결혼식이 가능한 워싱턴 디시의 해군 부대 내 교회에서 식을 올렸습니다. 

수전 커디는 아들 필립과 딸 크리스틴을 낳았습니다. 수전은 아이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1959년 정보분야 일을 그만두고 로스 엔젤레스로 옮겼습니다. 결혼을 강력이 반대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고향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에는 배우인 오빠 필립 안과 동생 수라가 운영하는 파노라마 시티의 문게이트 식당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는 한편 늘어나는 한국인 이민자 사회를 지원하고, 한국의 역사와 뿌리를 보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78년 오빠 필립 안이 사망하자 수전 커디는 가장이 돼 집안 일을 이끌어 갔습니다. 1990년까지 식당을 운영하면서 수전은 파란만장한 아버지의 독립운동사를 포함한 가정의 기록을 수집 정리했습니다. 수전 커디는 안창호의 흥사단 활동시기부터 내려오던 각종 기록들을 1983년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수전 커디는 연로해 가면서도 미국 해군이나 한인사회 행사가 있을때면 초청 연설을 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습니다. 

수전 커디는 정부 기관이나 비정부 기구로부터 수 많은 표창과 훈장을 받았습니다. 2003년 캘리포니아 주 제 28구역 의회는 공공 복지를 위한 헌신으로 수전을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했습니다.

2006년 10월 에는 워싱턴 디시에 있는 Asian American Justice Center로부터 용기있는 미국인 상을 받았습니다. 

2015년 로스 엔젤레스 카운티 이사회는 수전 커디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선포 되는 날, 열렬한 수전의 팬이기도 한 마크 리들리 토마스 이사회장은, ‘그녀가 남성들의 세상인 때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으로써 여러가지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또한 반 아시아 정서가 번지고 있어도 수전 커디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찬양했습니다. 

수전 안 커디는 2015년 6월 24일, 캘리포니아의 노스릿지에 있는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인 2016년 5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수전 커디를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여성 영웅, Unsung Women’으로 선정했습니다. 

2020년 미 국무부가 운영하는 공공외교 웹사이트 ‘쉐어 아메리카’는 수전 안 커디를 ‘미국의 영웅’이자 ‘선구자’로 소개했습니다. 수전 안 커디는 단순히 독립 운동가의 딸로서만이 아니라, 미국 내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내의 수많은 소수민족 공동체에 희망과 가능성을 열어준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