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감미로운 목소리의 가수, 냇 킹 콜

2020.12.25 2: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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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감미로운 목소리의 가수, 냇 킹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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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 킹 콜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교회에도 거리에도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집니다. 캐롤 중에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흑인 가수 냇킹콜의 노래도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본명이 나다니엘 애담스 콜(Nathaniel Adams Cole)인 냇킹콜은 미국에 스윙이라는 음악이 유행하던 시절 가장 뛰어난 가수 중 한 사람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피아니스트에다,  인기있는 악단의 단장이기도 했습니다.

주옥같은 명 발라드 곡을  부드러운 바리톤 음색으로 부른 냇 킹 콜. 그는 수많은 히트곡들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냇 킹 콜 쇼’의 진행을 맡아 최초의 전국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를 진행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기도 했습니다.  

콜은 1919년 3월 17일, 미국 남부 앨라바마 주 몽고메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교회 성가대 감독이었습니다. 콜은 4살때부터 어머니한테서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10대 초반에는 정식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았지만 결국 그것은 젖혀놓고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로 돌아섰습니다. 15살이 되자 콜은 학교를 아예 그만두고 재즈 피아노 연주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순회하는 악단을 따라 다니며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콜은 킹 콜 트리오(King Cole Trio) 라는 악단을 조직했습니다. 악단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습니다. 1943년 드디어 이들의 곡  That Ain 't Right 가 인기 곡 차트에 오르게 됐습니다. 

1944년에는 콜이 아버지의 교회 설교에서 따온 내용으로 만든 Straighten Up and Fly Right가 다시 한번 인기 차트에 오릅니다. 

이어 이들 트리오는 크리스마스 고전 The Christmas Song,  발라드 곡인 For Sentimental Reasons로 팝 힛트 인기 순위 정상으로 올라서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가 되자 콜은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가수로 떠 올랐습니다. Nature Boy, Mona Lisa, , Unforgettable, Too Young등 그의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형 가수가 된 콜은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연예인들, 루이 암스트롱, 엘리 핏즈제랄드, 작곡가 넬슨 리들 등과 어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연예인들과도 친구가 됐습니다.  

그는 자주 인종 차별에 부딛치곤 했습니다. 특히 남부 지방 공연에서 흔히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1956년에는 알라바마에서  공연을 하다 백인 우월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습니다.  흑인들은 흑인들대로 그가 인종차별에 미온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콜은 어디까지나 연예인이지 인권운동가는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인기 차트에서 콜의 위치는 잠시 흔들렸으나 60년대 초 그의 인기는 다시 급상승 했습니다. 1962년 카츄리 풍의 노래,  Ramblin' Rose, ‘덩굴진 장미’는 빌보드 순위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듬해 봄, 새로 나온 경쾌한 노래 Those Lazy-Hazy-Crazy Days of Summer는 팬들을 완전 사로잡았습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게으르고 몽롱하고 미친 여름날들’이라는 뜻입니다.  

콜은 한국 민요 아리랑도 불렀습니다. 그는 1963년과  1965년 해외 순회 공연 중 서울을 방문해 아리랑을 한국말 가사로 불러 한국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콜은 1956년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텔레비젼의 버라이어티 쇼 진행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The Nat King Cole Show  라는 이 프로그램은 카운트 베이시, 페기 리, 새미 데이비스 쥬니어, 토니 베넷 등   당시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쇼 프로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쇼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콜은 그 이유를 전국적인 규모의 스폰서, 즉 광고주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형 스폰서들이 흑인이 진행하는 TV 쇼에 광고를 싣기 꺼려하는 당시의 현실을 잘 말해주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쇼는 사라졌지만 콜은 The Ed Sullivan Show 나 The Garry Moore Show 등에 계속 출연했습니다. 

냇킹콜은 1940년대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한 영화에서 조그마한 배역을 맡으면서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1957년의 영화 이스탄불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같은 해 나온 차이나 게이트라는 전쟁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가 큰 역할을 맡은 또 다른 영화는 1958년 개봉된 센트루이스 블루스였 습니다. 1965년 제인 폰다, 리 마빈 등과 같이 출연한 해학적인 서부 영화 ‘캣 밸로우’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됐습니다.

1964년 냇킹콜은 폐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백인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최초의 흑인 음악 예술인으로 30년간 미국 대중음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는  결국 1965년 2월 15일, 불과 45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로스 엔젤레스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로즈마리 클루니, 프랭크 시나트라, 잭 베니 등  당대의 정상급 연예인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콜은 불과 17살에 나딘 로빈슨과 결혼했으나 1948년 이혼했습니다. 콜은 그후 가수인 마리아 호킨스 엘링턴과 결혼해 다섯 자녀를 키웠습니다. 셋은 이들 사이에서 난 자녀들이고 둘은 입양했습니다. 친딸인 나탈리 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러개의 그래미 상을 받는 정상급 가수가 됐습니다. 

그가 타계한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가 남긴 노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크리스마스 송’ 은  매년 이 시기가 오면 거듭 되살아 나는 성탄절Classic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