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2020.5.22 오전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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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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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난 1993년 5월 미국 뉴욕의 갤러리에서 백남준이 전시된 작품 옆에 서 있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백남준은 전위 음악과 행위예술, 비디오 등에 기반한 혁신적 작품 활동으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며, 20세기 후반 예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1960년대, 텔레비전 수상기와 그 화면을 이용해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 즉 비디오 아트는 대단히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미술가들이 붓이나, 물감, 캔버스를 사용하듯 백남준은 텔레비전 수상기와 비디오 영상을 도구로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티스트일 뿐 아니라, 작곡가이며 연주가이고, 전위 예술가이며 철학자였습니다.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방직회사를 경영하는 거부 백낙승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백남준은 당대의 유명한 스승들로부터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배웠습니다. 한국 전쟁이 나던 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도쿄대학에서 미술과 미술사, 음악사를 공부한 그는 다시 독일로 건너가 뮌헨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거기에서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를 만납니다.  

케이지는 전위 예술가, 즉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일상에서 나오는 소리를 음악에 삽입하는 실험적 음악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케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백남준도 자신의 요소를 연결한 실험적 예술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백남준은 첫 퍼포먼스로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 녹음기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공연했습니다.  서독의 소도시 부퍼탈(Wuppertal)에서는 이정표적인 작품 ‘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을 발표했습니다. 한 방에 13대의 텔레비전을 연결해 놓고 일부에는 자석을 갖다 대서 일그러진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 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비디오 예술이라는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독일의 한 신문은 이 전시를 미술사에 큰 변화를 가져올 중대한 사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백남준은 196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비디오, 음악, 행위가 혼합된 여러 퍼포먼스를 하며 관심을 모았습니다. 첼로 연주자이자 플럭서스 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맨과도 공연했습니다. 백남준은 무어맨 앞에 엎드려 인간 첼로가 되기도 하고,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공연도 있었습니다. 

백남준은 1974년대 불상을 주제로 한 작품도 여럿 만들었습니다. 부처의 정면에 있는 화면에는 부처의 모습이 비치고 다른 스크린은 현란한 색상의 전혀 다른 영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백남준을 세계적인 예술가로 떠오르게 한 퍼포먼스는 1984년 1월 1일, 최초로 미국과 유럽을 통신위성으로 연결한 생방송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습니다. 이날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는 요제프 보이스의 퍼포먼스, 배우 이브 몽탕, 뉴욕에서는 작곡가 존 케이지, 현대무용의 거두 머스 커닝햄 등 여러 세계적인 예술인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공연은 뉴욕 공영 방송에서 내보냈고, 미국의 L.A, 뉴욕, 프랑스 파리, 독일 쾰른, 한국 등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 중계됐습니다. 백남준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중계방송을 총지휘했습니다. 이 방송의 시청자는 2천4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그 시대에 세계를 단 몇 초 만에 연결한 이 프로그램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처럼 TV에 의해 지구인들이 지배를 받지 않고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백남준의 명성은 한국에도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국의 초대를 받아 30여 년 만에 모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다다익선.

백남준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해 “The More The Better.” 즉 ‘다다익선'을 제작했습니다.  TV 수상기 1천3대를  높이 18.5m까지 쌓아 올린 거대한 작품이었습니다.  

또 하나 유명 작품은  1995년에 만들어진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입니다. 직역하면 ‘전자 슈퍼 고속도로: 미 대륙 알래스카, 하와이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이가 12m, 높이가 4m가 넘는 이 작품은 336개의 테레비젼과 50개의 DVD 재생기, 그리고 170 m가 넘는 네온 선이 연결돼 미국 지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통신에 대해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Electronic Superhighway)’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백남준이 처음이었습니다. 백남준은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통신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점을 예측했고,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자신의 채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1993년 백남준은 미국 휘트니, 브라질 상 파올로와 더불어 세계 3대 예술제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가했습니다. 베니스 행사에 참가해 ‘시스틴 성당’이라는 주제의 비디오 아트로 그는 대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설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백남준은 한국 예술을 국제사회에 진출시키고 국제 미술을 한국에 소개하는 예술 거래인이기도 했습니다. 1995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비엔날레인 광주 비엔날레에서 특별전 인포아트(InfoArt)전을 열었습니다.  

2004년 백남준은 뉴욕시 소호의 한 스튜디오에서 화려한  물감으로 피아노에 채색을 하고 넘어뜨리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이 퍼포먼스는 생애 마지막 이벤트가 됐습니다.  

재벌 집안에 태어나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선, 백남준. 그러나 그는 돈을 모으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술 활동과 생계를 위해 돈을 꾸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항상 허름한 노숙자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방송국에 갔다가 경비원으로부터 쫓겨날 뻔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백남준은 일본 비디오 아티스트 전위 예술가 시게코 구보다와 결혼해 예술의 동반자로서 살아갔습니다. 백남준은 2006년 1월 미국 남부 마이애미에서 타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