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지구상 최고의 행운아" 루 게릭

2020.8.15 2: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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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지구상 최고의 행운아" 루 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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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프로야구의 영웅 중 한 명인, 루 게릭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메이저 리그 프로 야구가 2020 시즌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거의 4개월이나 늦게 개막됐습니다.

통상 한 팀당 162경기를 치르게 돼 있지만, 올해는 60경기만 치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관중 없이 치러지지만 그래도 텔레비전 중계는 많은 사람이 시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기 있는 스포츠 시즌이 되면 새로운 스타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또 사라져가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경이적인 기록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희귀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야구 선수, 그러나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운아’라고 말한 루 게릭도 아쉽게 떠난 영웅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루 게릭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의 선수 생활을 빼고 프로 선수로만 활약한 기간이 16년이나 됩니다. 1923년부터 1939년까지 선수로 뛰는 동안 그는 오직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만 활동했습니다. 왼손잡이 타자였고 주 포지션은 1루수였습니다.

루 게릭의 프로 선수로서 기록한 히트가 무려 2천721개, 홈런이 493개, 타율이 3할 4푼으로 아주 높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소속한 뉴욕 양키즈 팀은 모든 프로 야구팀 중 최고를 가리는 월드 시리즈에서 6번이나 챔피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게임에서 무려 4번이나 홈런을 친 기록도 있습니다.  최우수 선수들로만 구성되는 올 스타 팀에  7년 연속 선정이 됐고,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 2회 등 일일이 그의 뛰어난 기록을 소개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건 2천 회가 넘는 연속 출전이란 기록입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선수라도 아플 때도 있고 다쳐서 못 나갈 때도 있는데, 루 게릭은 중간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이 무려 2,130회나 출전을 한 것입니다.  

1995년 볼티모어 오리올스팀의 칼 립킨에 의해 갱신이 될 때까지 56년 동안이나 그의 기록을 깬 선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기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도 ‘Iron Horse’, 철마였습니다. 

루 게릭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뉴욕 양키스는 그의 유니폼 번호 4번을 이후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이 됐습니다. 

루 게릭은 1903년 6월 19일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독일계 이민자인  하인리히 그렉,  어머니는 크리스티나 그렉이었습니다. 가난은 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집안이었습니다. 

태어날 때 루 게릭은 약 6.3kg이나 되는 몸집이 큰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야구공 놀이를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루 게릭이 공을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 야구팀에 들어가 시합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루 게릭은 나중에 ‘운동장에 처음 섰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는 데다, 환호 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 무서워 집으로 가고 싶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루 게릭에게 만약 경기를 포기하면 졸업을 안 시키겠다고 위협까지 해가면서 운동을 시켰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팀에서 매우 유능한 선수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동안 메이저 리그, 즉 미국 프로야구연맹의 소속 팀인 뉴욕 자이언츠 구단의 임원 한 사람이 루 게릭이 공을 치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팀 매니저한테 데리고 가서 경기를 시켜보도록 했습니다. 

매니저는 루 게릭이 재목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메이저 리그에서 뛰기에는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니 코네티컷주 하드포트에 있는 마이너 리그에 들어가서 운동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루 게릭은 마이너 리그에서 번 돈을 저축해 뉴욕에 있는 명문 컬럼비아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컬럼비아에서는 학교 대표 팀에 들어갔습니다. 루 게릭은 공을 하도 강하게 쳐서 경기장 밖의 행인들이 공에 맞을까 봐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뉴욕 양키즈 야구팀이 루 게릭을 스카우트했습니다. 양키즈는  1923년 시즌에 3천 500달러를 주겠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큰돈이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미국 프로야구팀 뉴욕 양키스의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서 베이브 루스 선수(왼쪽)와 밀러 허긴스 감독, 루 게릭 선수.

뉴욕 양키즈는  루 게릭이 훌륭한 재목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양키즈는 팀의 또 한 명 유명 선수 베이브 루즈와 함께 팀의 타력을 강화했습니다. 루 게릭은 1925년 6월 초 정규 시즌 첫 경기에서 1루수로 나섰습니다. 이때부터 루 게릭의 기량은 날로 늘어났습니다.

경기를 할 때마다 상대 팀 투수들은 뉴욕 양키즈의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악몽이었습니다. 1927년에 베이브 루스는 홈런을 무려 60개나 쳤고, 루 게릭은 47개를 쳤습니다. 루 게릭은 그 해 아메리칸 리그의 MVP, 즉 가’장 뛰어난 선수상’을 받았습니다.  그 해 뉴욕 양키즈가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33년 루 게릭은 엘리노어 트윗쳐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시카고 여성이었습니다. 엘리노어는 루 게릭이 최고의 선수로 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습니다. 나중에 루 게릭이 앓아누웠을 때는 옆에서 늘 그를 보살폈습니다.  

뉴욕 양키즈에서 활동한 지 13년이 되던 해인1938년 5월 31일에는 2천 회 출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이 숫자는 그 이전 기록자보다도 갑절이나 많은 횟수였습니다. 루 게릭은 그해 시즌을 타율이 거의 3할대를 기록했습니다. 득점도  115점이나 됐습니다. 

이때야말로 루 게릭에게는 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루 게릭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뛰고 달리는 모습이 마치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공을 던지고 잡는데도 어려워했습니다. 루 게릭에게 치명적인 질환이 찾아온 것입니다. 처음에 게릭은 그런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해 겨울 루 게릭은 부인과 함께 아이스 스케이팅을 하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제대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 뉴욕 양키스타디움에 루 게릭을 기리는 동판이 세워져 있다.

다음 시즌이 열렸을 때 그는 세 번 출전했습니다. 루 게릭이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총 2천 130 게임에 출전한 기록을 수립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 출전에 히트를 단 한 개도 치지 못했습니다. 1939년 5월 그는 결국 매니저에게 더 이상 뛸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해 6월 19일 루 게릭은 36회 생일을 맞았습니다. 그날 의사는 루 게릭이 근육 기능이 퇴화하는 치명적인 희귀병을 갖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했습니다. 근 위축성 측생경화증, ALS라는 것으로, 뇌에서 시작해 척추로 번지고 결국 체내의 모든 근육이 작동을 할 수 없게 되는 병입니다.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루 게릭에게는 이날이 슬픈 생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ALS를 보통 루 게릭 병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그러나 루 게릭은 죽어가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렵거나 슬퍼하는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1939년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는 미국의 위대한 야구 선수의 고별사를 듣기 위해 6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 스타디움에 메아리쳤습니다.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I might have been given a bad break, but I've got an awful lot to live for.  Thank you.(저는 스스로를 지구상에서 가장 행운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불행이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사는 의미가 많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루 게릭은 투병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그는 결국 1941년 6월 2일 불과  37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가족, 친구, 야구선수 등 그를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미국인들은 한 위대한 야구 영웅의 상실을 슬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