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세계적 대학과 의료기관을 설립한 재벌, 존스 홉킨스

2020.5.15 1: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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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세계적 대학과 의료기관을 설립한 재벌, 존스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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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세계적 대학과 의료기관을 설립한 재벌, 존스 홉킨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존스 홉킨스.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멀지 않은 볼티모어시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명문 사립 존스 홉킨스 대학교가 있습니다. 140여 년 전 설립된 이 학교에는 현재 9개 단과대학과 대학원 과정 전문직 학교에 약 2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2019년까지 모두 39명이나 되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우수한 학교를 세운 인물은 바로 이 지역 토박이 재벌 존스 홉킨스였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1795년 5월 19일, 메릴린드주 앤아룬델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새뮤얼 홉킨스와 해나 홉킨스 사이에서 난 11명의 자녀 중 둘째였습니다.  

소년 시절 존스 홉킨스는 근처에 있는 사우스리버(South River)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오래 하지 못하고 농장 일을 해야 했습니다. 존스는 17살이 되자 농장을 떠나 대도시 볼티모어로 가서 삼촌 제라드 홉킨스가 경영하는 식품 도매상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삼촌과 함께 일하면서 사업을 배운 그는 뛰어난 경영인의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구식 사고방식에다 사업체 운영도 시대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1819년 미국에 금융위기가 몰아쳤을 때 현금이 없는 고객들은 집에서 주조한 옥수수 위스키로 값을 지불하고 싶어 했습니다. 보수적 퀘이커 신자인 삼촌에게 거래 대금을 술로 받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동업자를 끌어들여 독자적인 식품 도매상을 차렸습니다. 식품 대금을 위스키로도 받으면서 젊은 사업가의 문전에는 고객들이 줄을 섰습니다. 첫해에만 매상이 20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그때의 20만 달러는 요새 가치로 치면  440만 달러가 넘는 큰돈이었습니다. 

얼마 후 존스 홉킨스는 두 동생과 함께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사업체 명칭도 ‘홉킨스 & 브라더스(Hopkins and Brothers)’로 바꾸었습니다. 홉킨스 형제들은 버지니아주와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리고 더 멀리 서쪽으로 오하이오주까지 사업망을 늘려나갔습니다. 물물교환 방식으로 들어오는 옥수수 위스키는 ‘홉킨스 베스트(Hopkins’ Best)’라는 상표를 붙여 팔았습니다. 

얼마 후 존스 홉킨스는 식품 도매업을 동생들에게 맡기고 은행업을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사업가의 감각을 가진 존스 홉킨스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금융업에서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곧 볼티모어 상공업은행의 사장이 됐고, 여러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은행업 외에도 존스 홉킨스는 화재-생명보험 회사, 증기 여객선 사업 등에도 진출했습니다.  

그가 벌인 큰 사업 중 하나는 철도였습니다. 그가 손을 댄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회사(Baltimore & Ohio Railroad)’는 미국 철도 산업 초창기에 등장한 대형 철도회사의 하나였습니다. 철도 수송은 먼 거리에까지 퍼져 있는 홉킨스 브라더스의 식품 도매상에 상품을 실어나르는 데도 더없이 긴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철도는 마차에 비교할 수 없이 효율적이었고, 상품의 부패와 손상도 크게 줄여주었습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받았지만, 볼티모어시는 머지않아 다시 번창했습니다. 볼티모어는 목화, 제분, 각종 제조업 등에서 미국 굴지의 도시로 변했고, 해운과 철도의 발달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농산물 거래 도시가 됐습니다. 미국 남부 여러 주를 대상으로 하는 금융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볼티모어가 번창하면서 존스 홉킨스의 부도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1996년에 발행된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빌 게이츠까지 미국 100대 부호 명단’이라는 책에서 존스 홉킨스는 69위를 차지했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볼티모어의 상류층, 지식인층과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대부분 퀘이커교, 즉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회원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1857년 피바디 음악대학을 설립한 조지 피바디도 있었습니다. 피바디의 자문을 받고 있던 존스 홉킨스는 자신도 막대한 부를 사회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볼티모어는 남북전쟁으로 피해를 입은데다 황열병과 콜레라가 연달아 엄습했습니다. 1832년 여름에만 850여 명의 볼티모어 시민이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볼티모어에 의료시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홉킨스는 1870년, 700만 달러의 재산을 이 분야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작성했습니다.  이 기증액은 요즈음 가치로 약 1억 3천 800만 달러에 해당되며,  그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사회 기부였습니다.   

홉킨스는 그 자금으로 무료 병원과 의과대학, 간호대학, 일반 대학을 설립하도록 했습니다. 대학은 실력은 있으나 돈이 없어 입학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홉킨스는 또 청소년 교육과 빈곤층 가정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설립하는 계획도 수립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퀘이커 교리를 따른 그는 흑인 고아원 설립에 2만 달러를 따로 배정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병원에서 흑인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조치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막대한 부를 누렸으면서도 겸손하고  검소했습니다. 그는 운전사가 모는 차를 타기보다 걸어 다니기를 좋아했고, 제대로 된 외투도 한 벌 없었습니다. 홉킨스는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일이 생기면 기꺼이 거액을 쾌척했습니다.  

홉킨스는 젊었을 때 사촌인 엘리자베스 홉킨스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즉 존스가 처음 일했던  식품 도매상의 삼촌 제라드는 결혼을 적극 반대했습니다. 퀘이커 사회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은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평생 독신으로 있으면서 서로 사이좋은 친척으로 살아갔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1873년 12월 24일, 79세를 일기로 볼티모어에서 타계했습니다. 다음 날 ‘볼티모어선(Baltimore Sun)’ 신문은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싣고 ‘막대한 부를 쌓는 데 성공하고 그것을 사회에 바친 모범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났다’며 애석해했습니다.   

존스 홉킨스가 사망하자 곧 소집된 재단 이사회는 존스 홉킨스 대학과 의료센터 설립에 착수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인 1876년 대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1889년에는 병원, 1893년에는 의과대학이 설립됐습니다. 또한, 보건 대학이 1918년, 간호대학이 1984년에 개교했습니다.  

140여 년 전 존스 홉킨스는 미국의 교육 기관에 대한 최대의 유산을 남겼고, 그것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대학과 보건 의료 시설이라는 알찬 결실로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