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비폭력 민권운동의 마지막 거목, 존 루이스

2020.8.7 2: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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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비폭력 민권운동의 마지막 거목, 존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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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비폭력 민권운동의 마지막 거목, 존 루이스의 이야기입니다.

존 루이스 전 연방하원의원.

미국 민권운동의 거목 존 루이스 연방 하원의원이 지난 7월 17일 80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그는 인권을 수호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며 사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일생을 바친 투사였습니다. 30여 년 동안의 의정활동 중 최고 수준의 도덕적 기준과 원칙을 추구한 그의 헌신은 미국 의회에서 당을 초월한 지원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존 루이스는 1940년 2월 21일,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트로이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흑백 인종이 따로 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농장에서 자라면서 앨라배마  파이크카운티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렸을 적 존은 라디오 방송에서 몽고메리시 버스 거부 운동 소식과 그 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도  민권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심을 한 루이스는 일생동안 진보적 사회운동과 미국 인권투쟁의 선봉에 섰습니다.

존 루이스는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피스크(Fisk) 대학에서 종교와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함께 내슈빌의 식당에서 흑백 손님을 따로 앉히는 제도에 항의하는 농성을 주도했습니다.

1961년에는 미국 남부의 시외버스에서 행해지고 있는 흑백 좌석 분리 제도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13명으로 시작된 ‘Freedom Rides’, 즉 자유 승차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같은 뜻을 가진 청년들끼리 워싱턴 D.C.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시외버스에 올라타 백인용으로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는  시위였습니다. 맨 처음 이 운동에는 흑인 6명, 백인 7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이 남부를 통과할 때 여러 곳에서 야구 방망이, 쇠사슬, 철제 파이프 등으로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몽고메리에서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에서 폭행이 벌어져  존 루이스는 머리를 몽둥이로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흑백 젊은이들이 함께 참여한 ‘프리덤라이드(reedom Ride)’ 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한 그룹이 강제 해산당하면 다른 그룹이 그 뒤를 이어 다음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민권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63년에서 1966년까지 존 루이스는 자신이 창립 회원이었던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SNCC)’의 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기구는 민권운동에서 농성을 비롯해 각종 투쟁을 벌이는 학생 운동의 중심이 됐습니다.

아직 23살 밖에 안 된 나이에 존 루이스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됐습니다. 1963년 그는 민권운동의 6대 거목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는 마틴 루서 킹, 로사 파크스 등 쟁쟁한 인사가 포함됩니다. 그는 1963년 8월 워싱턴 디시에서 열린 역사적인 민권행진을 조직했습니다.   

바로 이 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존 루이스도 이 대회에서 연설했습니다. “참고 기다리라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오는 자유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자유를 원합니다.” 이날 연설한 인사 중 존 루이스는 가장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운데 왼쪽)와 존 루이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의장(오른쪽) 등 민권단체 지도자들이 지난 1963년 8월 워싱턴 연방의회를 방문했다.

1964년  존 루이스는 SNCC의 활동을 ‘Mississippi Freedom Summer’로 불리는 운동에 집중시켰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 남부 지역 흑인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고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남부 흑인들의 고통을 인식하게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다음 해 그는 또 한 번 전국의 관심을 끈 중대한 사건의 선봉으로 나섰습니다. 1965년 3월 7일, 존 루이스는 동료들과 함께 600여 명의 시위대를 조직해 흑인 투표권을 요구하는 평화 행진을 벌였습니다. 행렬이 앨라배마의 셀마에서 주 수도인 몽고메리로 가던 중 ‘에드먼드 피터스’ 다리를 건너자 주 방위군이 가로막고 강제 해산에 나섰습니다. 방위군은 최루탄을 쏘며 곤봉으로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했습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선두에 있던 존 루이스는 방위군의 타격으로 머리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몇몇 동료들이 쓰러진 루이스를 들고 다리 밑 교회로 대피시켰습니다. 루이스는 이제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언론을 타고 전해진 남부의 민권 운동에 대한 과도한 진압은 전국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8월 6일, 투표권법에 서명했습니다.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피의 일요일’은  투표권법이 제정되도록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40여 차례에 걸친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고, 체포를 당하면서도 존 루이스는 비폭력 운동을 고집했습니다. 그는 단 한 차례도 가해자에게 반격을 가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1966년 SNCC를 떠난 뒤 그는 유권자 교육 사업인 VEP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거의 400만 명에 달하는 소수민족의 유권자를 등록시켜, 미국의 정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동시에  학생 운동으로 한때 쉬었던 대학 공부를 다시 계속해 종교와 철학 전공으로 피스크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같은 내슈빌 소재 미국 침례 신학대학도 졸업했습니다. 

존 루이스는 1968년 릴리안 마일스와 결혼해 외아들 존 마일스 루이스를 두었습니다. 마일스 여사는 2012년 타계했습니다. 
1981년 존 루이스는 애틀랜타 시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로 나아갔습니다. 1986년 11월에는 조지아주 제5 선거구에서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는 2년 임기인 하원의원에 16차례 연달아 당선되면서 타계할 때까지 워싱턴에서 의정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민주당 원내 부총무를 맡았고, 세입 세출 위원회, 수입보장 가족 지원 소위원회 등에 소속돼 일했습니다. 
존 루이스는 의회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의원이었습니다. 루이스 의원은 1991년의 걸프 전쟁을 반대했으며, 총기관리법 통과를 위해 연좌 농성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루이스 의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왕을 갖고 있지 않고 대통령을 갖고 있는 것”이라며 그의 탄핵안에도 찬성했습니다. 

역사적인 1965년의 셀마 행진에서 경찰의 잔인한 구타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소작농의 아들 존 루이스.  민권운동의 지도자로 우뚝 선 그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6개월간의 투병 끝에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지난달 27일 미국 인권운동 지도자 존 루이스 전 연방하원의원의 관이 워싱턴 연방의사당 중앙홀에 안치됐다.

그의 시신은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애도객들의 조문을 받았습니다. 흑인 의원이 의사당 내 중앙 홀에서 조문을 받은 건 루이스 의원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조지아주 의사당으로 옮겨져 그가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마지막 인사를 받았습니다. 

숨을 거두는 순간을 앞두고 존 루이스는 마지막 에세이를 남기고, 이를 장례식 날 발표하라고 유언했습니다. 7월 30일 오전 7시, 장례식 4시간 전 공개된 마지막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이 펜을 들어 21세기를 기록할 때, 증오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끝내는 평화가, 폭력과 공격, 전쟁을 이기도록 한 세대는 바로 여러분의 세대였다고 쓰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