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프레더릭 더글러스

2020.6.26 4: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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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프레더릭 더글러스
방송 시작 시간 오전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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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노예 출신 지도자 프레더릭 더글러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민권 운동가이며 작가이고, 강력한 웅변가에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고문이었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 

정식 이름은 프레더릭 어거스터스 워싱턴  베일리(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 1818년 메릴랜드주 터카호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그의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는 에드워드 로이드 대령이라는 사람이 소유한 대 농장의 노예였습니다. 이들의 첫 번째 주인은 아론 앤서니라는 백인 대위였습니다.

프레더릭은 아버지가 백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안토니 대위가 바로 아버지였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프레더릭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해리엣 베일리가 다른 농장으로 보내졌기 때문이었죠. 두어 차례 어머니가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프레데릭이 7살 때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프레더릭은 그후 할아버지 아이잭 베일리와 할머니 벳시 베일리 밑에서 자랐습니다. 프레더릭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 지역의 다른 노예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고 가정은  사랑이 있는  곳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프레더릭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소유, 즉 노예 신분이라는 것을 적어도 어릴 때는 몰랐다고 합니다. 

당시 노예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고 주인은 가축이나 물건처럼 노예를 사고팔았습니다. 흑인 노예들은 다른 주인에게 팔려가 가족과 일단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나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프레더릭은 이제 자신이 조부모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과 비슷한 시기였는데요, 나중에 쓴 글에서 프레더릭은 자신의 일생 중 그날 집을 떠나야 했던 일이 가장 뼈 아픈 경험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프레더릭은 세상의 악과 탄압적 노예제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826년 프레더릭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시에 있는 휴 올드라는 사람에게 보내졌습니다. 다행히도 올드의 부인 소피아는 프레더릭에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마치 자기 집 식구처럼 대했고 글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매우 화를 내며 글 가르치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노예들에게는 교육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노예가 글을 읽을 줄 알면 반란을 일으키고 달아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소피아는 글 가르치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프레더릭은 볼티모어에서 만난 백인 소년들로부터 계속 글을 배웠습니다. 백인 소년들은 프레더릭에게 “너도 인간이야,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어”라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올드는 프레더릭을 에드워드 코베이라는 농장주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소문난 폭군이었던 코베이는 걸핏하면 프레더릭을 구타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프레더릭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체포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본 주인 휴와 소피아 올드 집으로 송환됐습니다. 프레더릭은 거기서 애나 머레이 라는 흑인 여성을 만났습니다. 프레더릭은 연상인 애나와 사랑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때 머레이는 노예 신분을 벗어나 파출부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레이는 돈을 모아 프레더릭에게 주면서 기차를 타고 뉴욕시로 탈출하라고 말했습니다. 프레더릭은 그렇게 해서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나이 20세. 프레더릭은 뉴욕에 도착한 감회를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자유로운 삶은 1838년 9월 3일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4일 아침 나는 대도시 뉴욕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자유인이었다. 어렸을 적의 꿈, 성인으로서의 희망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옛 주인에게 나를 얽어맸던 줄은 끊어졌다. 이제 누구도 나를 노예라고 부를 권한도, 나를 조종할 수도 없다.”

프레더릭 베일리는 뉴욕에서 이름을 프레더릭 더글러스로 바꾸었습니다. 노예를 추적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레더릭은 얼마 후 애나 머레이와 다시 만났습니다. 이들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매사추세츠주 베드퍼드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노예 폐지 운동은 184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프레더릭은 매사추세츠 난터케트에서 열린 Massachusetts Anti-Slavery Society라는 노예 반대 단체의 회의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노예 생활의 경험을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프레더릭은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하게 됐습니다. 그 회의의 대부분 노예 반대 운동가들은 백인들이었습니다. 프레더릭은 굵고 강력한 목소리로 비참했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청중들은 그의 연설에 큰 충격과 함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연설이 있은 후 매사추세츠 노예 반대 단체는 프레더릭에게  북부의 여러 주를 순회하면서 연설을 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프레더릭은 주인들이 노예들을 매일 구타하는 이야기, 굶주리는 이야기 등 잔인하고 억압적인 노예 생활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는 상당수가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프레더릭의  말을 믿지 않기도 했고, 그가 노예가 돼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후 그렇게 과장된 말을 하도록 훈련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프레더릭은 자신이 연설할 때 들려준 참혹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1844년 나온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그 책은 즉각 베스트셀러가 됐고, 3년동안 9번이나 새로 찍어 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돼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 퍼졌고  오늘날까지도 많이 읽히는 책이 됐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그 후에도 자신의 노예 시절에 대한 여러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여러 모임에서 연설도 많이 했습니다. 1852년 독립기념일에는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인과 흑인에게 독립 기념일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의 행사는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날은 여러분의 나라에 정치적 자유가 탄생한 날입니다. 7월 4일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축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7월 4일이 미국의 노예들에게는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흑인들에게는 매일 매일 겪는 그 무서운 차별과 벌을 1년 중 어느 날보다 뚜렷이 되새기는 날이 바로 이날입니다. 미국 말고는 이 시간 세상의 어느 나라도 그 이상 충격적이고 피를 흘리는 죄악이 자행되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노예제도에 대한 갈등도 전쟁의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프레더릭은 흑인들에게도 북군에 들어가 노예해방전에 참전할 수 있도록 허용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이나 북군의 백인들은 그 같은 안을 반대했습니다. 백인들은 흑인들의 머리가 좋지 않아 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드디어2년 후 흑인들도 군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프레더릭은 북군의 모병관으로도 일하면서 제54 매사추세츠 보병연대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흑인들은 진짜 군인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용감한 모습을 보여줘도  하찮은 일만 주어졌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링컨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프레더릭은 흑인 병사들도 백인 병사들과 또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링컨 대통령도 그 말에는 동의했지만 당장 그렇게 큰 변화를 실행에 옮기는 건 쉽지가 않았습니다. 1865년 북군이 승리하면서 남북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두어 달 후 링컨 대통령은 암살되고 그해 노예제는 폐지됐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그후 워싱턴 디시의 경찰서장을 포함한 여러 정부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은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2천 회가 넘는 연설과 함께, 수천 건의 글과 편지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투쟁 가운데는 여성의 권리도 포함돼 있습니다. 1895년 2월 20일, 그는 전국 여성 회의에서 연설했습니다. 그날 오후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워싱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78세였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저서 “나의 노예 시절과 자유”에서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유색인종의 영예, 사회적, 종교적, 지적인 지위를 위해 과거처럼  미래를 위해서도 힘쓸 것이다, 모든 인종에게 완전하고 조건 없는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한 중요하고 위대한 과업을 추구하도록 하늘은 나에게 목소리와 펜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