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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인물 아메리카]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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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821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새뮤얼 블랙웰, 어머니는 하나 블랙웰이었

습니다. 엘리자베스는 3남 4녀 중 셋째 딸이었습니다.

아버지 새뮤얼은 잘나가는 설탕 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11살 때 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사업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뉴욕을 거쳐 중부지방인 오하이오주에 정착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무엘은 오하이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두 언니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여자들만을 가르치는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두 남동생은 밖으로 나가 일했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에게는 암을 앓고 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최선을 다해 생명이 경각에 달린 친구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성 환자는 여자들이 더 잘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여자 의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친구도 만약 여성이 자기를 치료했더라면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했을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의학을 공부하라고 당부하면서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의대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학비도 비쌌습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의대 진학을 목표로 남부인 노스캐롤라이나주로 가서 교사로 일을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몇몇 의대에 지원했습니다. 예상대로 어떤 의대도 엘리자베스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대학 관계자들은 꼭 의사가 되고 싶으면 남장을 하고 프랑스 파리로 가보라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중 뉴욕주에 있는 ‘제네바 의과대학’이라는 곳에서 받아들이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학교는 오늘날의 뉴욕 주립 의과대학인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Upstate Medical University’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다지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의대에서도 여자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추천한 교수의 체면을 생각해 학생들에게 여학생이 들어와도 되겠느냐는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학생들은 여자가 들어온다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더 많은 찬성표를 던지자 학교 당국도 어쩔 수 없이 엘리자베스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입학이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은 순탄지 못했습니다.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엘리자베스에게 따로 떨어져 앉으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실험실 사용을 못 하게 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사람들이 남녀 구별을 무너뜨리는 나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어려움을 다 참고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1849년 제네바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성적도 좋았습니다.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포함해도 의대 과정을 이수한 여성은 엘리자베스가 처음이었습니다. 언론은 엘리자베스의 의대 졸업에 호의적인 보도를 했습니다. 졸업식에서 찰스 리 학장은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엘리자베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엘리자베스를 수련의로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유럽으로 갔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다니며 훈련을 쌓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 건 미국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한 병원에서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의사가 아니라 산후조리를 해주는 조산원 학생 자격으로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눈에 화학 약물이 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결과 엘리자베스는 한쪽 눈의 시각을 잃고 말았습니다. 의사의 꿈을 접어야 할지 불안도 하고 실망도 컸지만, 엘리자베스는 좌절하지 않고 영국 런던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그곳에 있는 세인트 바톨로뮤 병원에서 수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851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시에서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찾아오는 환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여의사라는 존재가 생소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가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극빈 지역에다 진료소를 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세우는 것, 또 하나는 여성들을 위한 의과대학 설립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이런 꿈은 여동생 에밀리가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에밀리도 오랜 세월 어려움을 겪은 끝에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의대를 졸업한 여의사였습니다. 블랙웰 자매는 헌 집을 수리해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정식 병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첫해는 역시 환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1년 내내 약 300명의 환자를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두 자매의 환자 진료는 뉴욕에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해 둘째 해에는 무려 첫해의 열 배가 넘는 3천여 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들 자매는 가난한 지역에서 진료하다 보니, 미리 막을 수 있는 병으로 고생을 하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방 의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환자의 집을 순방하며 집을 청결하게 하고, 음식을 관리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예방의학이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엘리자베스의 노력이 뉴스를 타고 알려지면서 의학계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868년 뉴욕시에 여성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예방 의학도 가르쳤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예방 의학 강좌가 생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추세에 힘입어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에서도 여자 의대들이 등장했습니다. 미국 최초의 간호학교도 세웠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는 의대의 운영을 동생 에밀리한테 맡기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습니다. 거기서도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의학 서적도 내고, 많은 강연을 다니면서 특히 예방 의학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1871년에는 영국 국립보건학회도 설립해 영국의 보건 증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영국에서는 간호사의 영역을 개척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가까운 친구로서 많은 일을 함께했습니다.

여러 가지 업적은 남겼지만, 엘리자베스는 결혼은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네 명의 자매 중 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자매는 여자들도 의학계에서는 물론 어느 분야에서나 남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도덕, 정결, 가족 계획, 동등한 남녀의 성생활, 기독 사회주의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남자들은 그렇게 주장이 센 여성과 결혼을 한다는데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뉴욕에서 진료소를 개설하던 35살 때 캐서린 키티 배리라는 고아 소녀를 입양했습니다. 아일랜드 출생인 배리는 블랙웰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87세 때 영국에 머물던 중 넘어져 회복이 어려울 만큼 정신과 육체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스코틀랜드에서 89세로 타계했습니다.

미국 여성 의사협회는 매년 뛰어난 여성 의료인을 선발해 엘리자베스 블랙웰 메달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1973년 블랙웰은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습니다. 미 우정국은 1974년 위대한 미국인 시리즈 기념 우표에 엘리자베스 블랙웰 우표를 발행해 그녀의 공헌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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