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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꾼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


[인물 아메리카]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꾼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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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를 만들어서 미국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꾼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를 소개합니다.

미국의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cotton gin)을 발명해, 18세기 미국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미국의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cotton gin)을 발명해, 18세기 미국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일라이 휘트니는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해 18세기 미국 면화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발명가입니다.

미국에서는 초기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에 의해 남부 지방에서 목화재배가 시작됐습니다. 기후가 적당해 농사가 잘됐고 질도 뛰어났습니다. 미국 정착민에게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는 것은 좋은 돈벌이가 됐습니다. 노동력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에 의존했습니다.

면화생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은 목화송이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솜 1lb, 약 450g의 씨를 분리하는 데 평균 6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런 속도로는 도저히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가 1793년에 만든 조면기는 상당히 간단한 구조였지만 이 기계는 30명 내지 50명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793년 미국의 면화 생산량은 세계 생산량의 1%에도 못미쳤습니다. 그러나, 조면기가 등장한 이후인 1860년경에는 전 세계 면화의 70%를 미국에서 생산했고, 그중 80%는 영국으로 수출됐습니다. 미국의 농장주들은 갈수록 많은 노예를 필요로 했습니다. 1860년에는 그 수가 4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일라이 휘트니는 1765년 북동부 매사추세츠 웨스트보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일라이 휘트니 시니어는 농토를 많이 가진 농장주였습니다. 일라이 휘트니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나이 불과 14살 때는 자신이 개발한 장치로 못을 만들어 내는 기술자가 됐습니다.

휘트니는 1789년 예일대학에 들어가 3년 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그는 계속 법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학비가 모자라 포기하고 대신 사우스캐롤라이나에 개인 교사 일자리를 구해 떠나게 됐습니다. 휘트니는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가는 배 안에서 독립전쟁의 영웅 나다니엘 그린의 미망인과 그의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린 장군의 부인 캐서린은 조지아주 멀베리에 있는 자신의 대 농장으로 휘트니를 초청했습니다. 18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남부의 조지아주는 돈을 벌려는 야심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휘트니는 개인 교사 자리는 포기하고 조지아로 갔습니다.

그린 부인도 대규모 목화 농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휘트니에게 목화씨 분리를 쉽게 하는 방법이 없겠는지를 물었습니다. 휘트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던 중 농장에서 고양이가 닭을 잡아먹으려는 것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고양이는 철장 안에 있는 닭을 밖으로 끌어당겼지만, 닭은 못잡고 털만 뽑히고 말았습니다.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cotton gin)'.
목화의 씨앗을 쉽게 분리하는 '조면기(cotton gin)'.

거기 착안한 휘트니는 약 1주일 만에 초보적인 조면기를 만들어 보였습니다. 가는 철사가 붙은 원통형 나무를 서로 엇갈려 돌리고 그 사이에 목화를 집어넣으면 철사에 의해 솜은 뜯기고 씨는 그 사이로 빠져나오도록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휘트니는 1794년 조면기 특허를 추진했습니다. 미국 남부 전역의 목화 농장에서 이를 사용하게 하고 그것으로 얻어지는 이익의 5분의 2를 권리금으로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구는 만들기가 쉬워 복제품이 널리 사용됐습니다. 농장들은 약간씩 변형해서 만들기도 했습니다.

휘트니는 여러 해 동안 복제판 사용을 막기 위한 법적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18세기가 다 갈 무렵 휘트니는 적당한 가격에 사용권에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휘트니는 사실상 거의 수입이 없었으나 농장주들은 거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복제품 범람으로 별다른 수익이 없게 되자 휘트니는 또 다른 사업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환 가능한 부품 시스템 개발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미국의 총기 대량 생산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됐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이 대두되자 미국 정부는 화기를 대량 공급할 수 있는 민간 업자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휘트니는 2년 안에 1만 정의 소총을 납품하겠다고 제안해 정부 계약을 따냈습니다. 연 5천 정씩 생산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소총은 한 기술자가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거치며 하나씩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총 한 자루마다 각기 디자인이나 성능이 달랐습니다. 숙달된 장인을 보유한 총기 회사라도 연간 500~700정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코네티컷에 공장을 차린 휘트니는 노동자들에게 각기 맡은 부품만을 반복해 만들어 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량의 부품을 조립만 하면 완제품이 나오도록 한 것입니다.

휘트니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처음 몇 년 동안은 정부에 약속한 양의 극히 일부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약속대로 1만 정을 만드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래도 휘트니는 정부로부터 1만5천 정을 더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제 노하우가 쌓인 휘트니는 불과 2년 동안에 주문량을 다 채워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휘트니는 회사의 주택 단지를 건설해 직원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코네티컷주의 마을이 오늘날의 휘트니빌이라는 곳입니다. 그는 고용주와 근로자들 간의 화목한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휘트니는 1825년, 59세 생일을 넘긴 지 한 달 만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암으로 고생하는 도중에도 그는 자신의 통증을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휘트니는 근면, 금주, 절약을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에 바탕을 두고 가족적인 공장 시스템을 발전시킨 미국식 산업혁명의 선구자였습니다. 현대의 조립 라인 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휘트니는 ‘미국식 기술의 아버지’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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