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고무산업의 혁명을 일으킨 발명가, 찰스 굿이어

2020.3.6 오전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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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고무산업의 혁명을 일으킨 미국 발명가 찰스 굿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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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산업의 혁명을 일으킨 미국 발명가 찰스 굿이어.

고대 이집트에서  아카시아 고무의 추출액을 접착제나 미라의 방부제 등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무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무가 오늘날 쓰이는 고무는 아니었습니다. 약 500년전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에서 고무를 들여왔을 때도 그것은 날씨가 더우면 냄새가 나고 끈적끈적하게 녹아버리고 추우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물질이었습니다.  그런 결점을 제거하고 오늘날처럼 다방면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제조법을 개발한 사람은 찰스  굿이어였습니다.

찰스 굿이어는 1800년 12월 29일 미 북동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그는 공부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굿이어는 20대 초, 필라델피아에서 건축자재상을 하던 중 신축성 있는 검, 즉 천연고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흥미를 느낀 찰스는 이 새로운 물질에 관해 신문에 난 글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 무렵 굿이어는 사업이 망하고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습니다. 고무의 가능성을 믿는 굿이어는 갇혀 있으면서도 부인에게 생고무 덩어리를 가져오라고 해 매일 그것을 반죽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끈적거리지 않으면서도 신축성이 있고, 열이나 추위에 강한 고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굿이어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 고무를 마그네시움 가루에 섞어 실험해봤더니 기대했던 대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어린 딸을 동원해 수백 켤레의 부엌용 덧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에 내놓기도 전에 여름이 찾아와 높은 기온으로 덧신은 진흙처럼 녹아버렸습니다. 거기에다 동네 사람들이 냄새가 고약하다며 항의를 거듭했습니다. 

굿이어는 어느 날 고무의 묵은 갈색을 색깔을 없애려고 질산을 발랐습니다. 그런데 색깔이 오히려 검은색으로 변했습니다. 화가 난 굿이어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며칠 뒤 굿이어는 문득 그때 집어던진 검은 덩어리의 느낌이 뭔가 좀 달랐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 쓰레기통에서 다시 꺼내 보니 고무가 천처럼 부드럽고 건조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질산 고무는 어느 누가 개발한 것보다 월등히 좋은 고무였습니다. 

그러자 뉴욕에 있는 한 업자가 수천 달러를 투자해 이 고무를 생산했으나 이번에는 대공황의 여파로 생산자나 판매자 모두 큰 손실을 보아야 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진 굿이어는 가족을 뉴욕의 스탠턴 섬에 있는 폐기된 고무공장으로 옮기고 항구에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했습니다.  

굿이어의 가장 큰 발명은 1839년에 찾아왔습니다. 그해 굿이어는 고무와 황을 테레핀 유에 섞어 쪄 보는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황을 섞은 고무를 자랑할 겸 한 잡화가게에 들렀습니다. 굿이어는 고무 덩어리를 보여 주다가 그만 뜨거운 난로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보니 고무가 녹지 않고 약간 그을린 정도였습니다.  속은 여전히 신축성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늘날과 같이 온도에 잘 견디는 고무를 만드는 가황법이 탄생한 것입니다. 과학계에서는 난로에 떨어뜨린 사고를 역사상 가장 축복받은 사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굿이어는 어느 정도의 온도에서 어느 정도의 압력을 가하면 양질의 고무를 만들 수 있는가도 밝혀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론에 세워진 찰스 굿이어 동상. 오른 손에 고무 덩어리를 쥐고 있다.

굿이어가 개량한 고무는  ‘최초이자 최고의 활용성이 있는 현대의 플라스틱’으로 불렸습니다. 만약 굿이어가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이권을 챙겼으면 그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굿이어는 사업상 거래나 지적 재산권 처리에는 말도 안 되게 허술했습니다. 자신의 발명품을 이용한 업자는 엄청난 부를 누렸는데, 그가 받은 로얄티는 있으나 마나였습니다. 굿이어는 오직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외국의 특허를 얻는데도 너무 느려 현지 업체에 기회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굿이어는 여러 해 동안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특허권 관련 소송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1860년 아픈 딸을 보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굿이어는 딸이 이미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져, 7월  1일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이 겨우 59세. 남긴 것은  20만 달러의 빚뿐이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가족은 굿이어 사망 후 어느 정도 로얄티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더 다행인 것은 그의 아들 찰스 주니어가 아버지를 닮아 발명에 재능이 있었고, 구두 제조 기계를 만들어 재정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 점이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후 세계적인 규모의 고무 제품 생산업체는 발명가인 찰스 굿이어를 기리기 위해 기업 명칭을 ‘굿이어 앤드 타이어 컴퍼니(Goodyear and Tire Company)’로 정했습니다. 

1976년 굿이어는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학교도 세워졌습니다. 프랑스는 국가 최고의 명예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굿이어가 생전에 겪었던 불행에 동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굿이어 자신은 본인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굿이어는 “인생이 달러나 센트의 기준으로만 평가돼서는 안 된다. 내가 나무를 심고 다른 사람이 과일을 거두었다는데 마음 쓰지 않는다. 사람이 진짜 후회할 일이 있다면 밭을 갈았는데 아무것도 영글지 않았을 때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