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워싱턴포스트를 세계적 언론사로, 캐서린 그레이엄

2020.3.27 오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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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워싱턴포스트를 세계적 언론사로, 캐서린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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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워싱턴포스트를 세계적 언론사로 등극시킨 캐서린 그레이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 명예회장.

세계적인 권위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Meyer Graham)은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수줍지만 강철같고, 권력을 갖고 있지만 겸손했던 지도자였다’고 찬양을 한 언론사의 사장 겸 발행인이었습니다.  

캐서린 메이어는 1917년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진 메이어(Eugene Meyer)는 투자 전문회사의 사주였고 연방준비제도 이사장, 세계은행 초대 총재를 지낸 부호였습니다. 어머니 애그네스는 5개 국어에 능통한 저술가이자 전위 예술가였습니다. 

아버지 유진 메이어는 1933년 몰락해 가던 신문사 워싱턴포스트를 사들였습니다. 당시 워싱턴에 존재하던 다섯 개 신문 가운데 이 신문은 가장 빈약한 신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캐서린은 아버지의 신문사에서 ‘독자란’을 담당하며 독자들의 글을 편집했습니다.  

캐서린은 필립 그레이엄 (Philip Graham)이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필립은 하버드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고,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와 친구 사이였습니다.  

결혼 후 그레이엄은 장인이 주인인 워싱턴포스트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장인이 신설된 세계은행 총재로 부임하자 그레이엄은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자리를 떠맡게 됐습니다.  

그레이엄은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를 합병하고 여러 개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매입하는 등  워싱턴포스트 사를 대대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레이엄은 영향력이 큰 여러 정치인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부인 캐서린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레이엄은 부인 캐서린의 존재를 무시하는가 하면 젊은 여기자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레이엄은 우울증을 겪게 되고 끝내는 196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4명의 자녀를 둔 캐서린 그레이엄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 대신 신문사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캐서린은 그런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 나갈지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캐서린은 아들이 커서 신문사를 떠 맡을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캐서린은 기업경영을 배운적도 없고, 언론사 운영은 너무나 생소한 부분이었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유명 법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부터 부지런히 자문을 구했습니다. 한편  벤자민 브래들리라는 젊은 편집인을 채용해 실무를 맡게 했습니다. 브래들리는 나중에 미국 최고의 편집국장이라는 평판을 듣는 유능한 인재였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차츰 신뢰도 높은 신문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1969년 캐서린 그레이엄은 워싱턴포스트 사라는 명칭을 가진 기업체의  회장 겸 신문사의 운영을 총괄하는 발행인이 됐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1970년대 펜타곤 문서와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미국 정치와 저널리즘에 큰 영향을 미치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적인 언론사로 떠올랐습니다.  

1971년 뉴욕 타임스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게 되는 통킹만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국방부의 기밀문서를 입수해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로 불리는 이 문서를 입수했습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이들 문서가 공개되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면서 법원에 보도 금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뉴욕 타임스에 대법원 결정이 나올 때까지 이들 문서를 보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난 1964년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명예회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보도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법률 고문들은 보도를 하지 말것을 편집부에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편집인과 기자들은 보도를 주장했습니다. 만약 보도한 뒤 대법원이, 그것이 부당하다고 판결할 경우 포스트는 폐간당할 수도 있었고 텔레비전 등 다른 사업체도 허가 취소를 당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은 캐서린 그레이엄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긴박한 순간에  “Go ahead”, 즉 보도하자는 과감한 선언을 내렸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 대법원은 보도가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언론 자유의 커다란 승리였습니다. 그레이엄은 한 인터뷰에서 행정부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고, 보도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편집인과 기자들이 옳다고 전적으로 믿고 있었고, 그래서 밀고 나가자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해인 1972년 6월 17일 일명 워터게이트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날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중앙위원회 사무실에 남자 5명이 몰래 침입하다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 칼 번스타인과 봅 우드워드는 이 사건을 집중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는 리차드 닉슨 행정부로부터 이 사건을 보도하지 말도록 각종 위협을 받았지만, 캐서린 그레이엄은 방송국 허가권도 포기할 수 있다며 보도진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포스트는 결국 공화당인 닉슨 행정부가  민주당의 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해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흠집 내려 했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포스트는 닉슨 대통령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까지 입수해 행정부의 부당한 음모를 폭로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닉슨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며 탄핵이 추진됐습니다. 1974년 8월 9일, 닉슨 대통령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캐서린 그레이엄은 신문 발행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 사는  포스트 외에 다른 주에서도 신문을 발행했고, 6개 지역 TV 방송국, 19개 주에 방송망을 가진 케이블 방송, 뉴스위크 등 여러 잡지, 교육 자회사 카플란, 인터넷 자회사 등을 갖는 대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포천 500(Fortune 500)’에 들어가는 기업체의 최초 여성 총수가 됐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신문이 살아야 공익도 있다고 믿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론이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사업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또 '언론사의 사주는 편집자에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를 명령하는 자가 돼서는 안 된다. 다만, 신문이 정확하고 공정하며 언론의 정도를 걸음으로써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1991년 아들 도널드 그레이엄에게 워싱턴포스트 사의 최고 경영인이자 발행인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당시 포스트 사의 자산 규모는 2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나이 80세가 됐을 때 캐서린 그레이엄은 자서전  ‘개인의 역사’(Personal History)를 펴냈습니다. 전통적인 가정주부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에 나갈 때까지 겪는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 등을 솔직히 들려주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끈 그의 자서전은 199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84세 때인 2001년 7월 17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며칠 전 넘어져 머리를 다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정부 고위 관리, 기업계 지도자 등 3천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석했습니다. 여러 대통령을 포함한 각계의 거물들을 친구로 두고 있지만, 거만하지 않고 겸손했던 그녀가 타계하자 워싱턴 D.C. 곳곳에는 조기가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