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미국의 소리’방송은 북한이 주장하는 2012년 강성대국의 해를 맞아 과거 동구권의 강성대국 운동 경험을 동구권 출신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들어보는 기획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구 소련 편인데요, 레닌그라드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입니다. 김연호 기자가 란코프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문) 구 소련 역사에서 북한의 강성대국 운동과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답) 1960년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20년 안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민 모두가 좋은 품질의 물건을 원하는 만큼 소비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거였습니다. 교육이나 의료 같은 사회보장도 무료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돈이 필요 없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거였죠. 문화, 기술 면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모든 나라를 앞지르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당 강령에 포함시켰습니다.

문) 굉장히 야심찬 공약이었군요.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그런 약속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답) 북한이 강성대국론을 들고 나온 이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야심찬 공약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데 아주 유용합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지상낙원에서 살 수 있다, 이런 약속을 일반 노동자들이 믿고 더 열심히 일하면서 정권을 지지하게 되는 거죠.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정적이었는데요, 스탈린의 사회주의가 국가권력에 관한 것이었다면, 흐루시초프의 사회주의는 개개인의 행복과 풍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스탈린과 차별화를 시도했던 겁니다.

문) 60년대 당시 소련의 생활수준은 미국에 비해 어땠습니까?

답) 미국보다 훨씬 생활수준이 낮았죠. 50년대 말부터 소련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국과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예를 들어 주택난이 아주 심해서 몇 가족이 한 아파트에 같이 살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수도물이 나오는 집도 드물었습니다.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통 사람들한테는 여전히 너무 비쌌습니다.

문) 그렇다면 소련 국민들의 불만이 꽤 컸을텐데, 어떻습니까?

답)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외국의 생활수준이 어땠는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 병사들이 유럽에서 전투를 하면서 유럽사람들의 생활상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생활수준이 소련보다 높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외국의 생활수준에 대해 알 수 없었습니다.

문)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20년 안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을 때 소련 국민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답) 10년 동안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난 뒤였기 때문에 처음엔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노동력을 동원하기가 수월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흐루시초프의 정책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5년 정도 지난 다음에는 아무도 흐루시초프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문) 이유가 뭔가요? 실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답) 처음엔 실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좋지도 않았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던 경제가 주춤거렸고, 60년대 중반부터는 식량이 부족해져서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 때부터 소련 국민들이 바깥 세상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해외여행을 했고, 외국의 라디오 방송이나 영화를 접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선진국의 생활수준이 훨씬 더 높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만큼 불만도 더 커졌습니다.

문)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는, 농업이나 공업을 어떻게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답)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특별한 구상은 없었고 황당한 경제실험만 있었을 뿐입니다. 소련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는 관리층 때문에 생겨난 거라고 평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을 교체하거나 행정책임을 조정하고 행정조직을 바꾸는데만 골몰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안고 있는 경직성을 수술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겁니다. 당시 이 문제를 건드리는 건 정치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흐루시초프 자신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경직성을 지적하셨는데,  소련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답)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는 노동력과 자원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경제성장을 이뤄나갔습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는 대규모로 동원할 노동력과 자원이 더 이상 많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스탈린 때만큼 강압적인 인구정책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아있는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경제체제의 효율성도 아주 낮았습니다. 군사기술은 계속 발전했지만 다른 산업 분야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낙후성을 면치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의 공통적인 문제였죠.

문)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황당한 경제실험을 했다고 하셨는데, 예를 들어 어떤 실험을 했습니까?

답)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육류, 특히 쇠고기 생산을 1~2년 안에 몇 배로 늘리겠다는 지방 당서기들의 말을 믿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그해 목표량을 달성해야 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소를 모두 도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음 해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문제가 드러나자 지방 당서기들 가운데 일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문) 이런 결과에 대해서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였습니까?

답) 절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밑에 있던 당 관료들에 의해서 권좌에서 쫓겨났습니다. 경제 실적이 실망스러웠던 데다가 고위 당 관료들의 권한을 축소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마지막에 권력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죠. 그 뒤로는 평생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습니다.

문)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실각한 다음에도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한 지도자가 또 있었습니까?

답) 전혀 없었습니다. 실패로 끝난 흐루시초프의 경제정책을 조롱했죠. 흐루시초프 시대가 끝난 뒤에 소련 정부는 현실적인 경제정책을 표방했습니다. 엄청난 경제실험을 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성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경제가 안정되기를 바랬고 가능하다면 느리지만 예측가능한 경제성장을 추구했습니다.

MC: 과거 동구권의 강성대국 운동 경험을 동구권 출신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들어보는 기획특집, 내일은 루마니아 편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