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10월 텍사스 어빙에서 연설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
지난 2002년 10월 텍사스 어빙에서 연설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복음주의의 대부  빌리 그레이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라디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20세기 복음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지난 3월 2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비롯한 국가 지도자들과 각계 요인, 가족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앞서 2월 21일 99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여러 언론은 “미국 기독교의 거목”, “세계적인 복음주의 전도사” 등으로 표현하면서 그레이엄 목사의 장례식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대단히 충실하게 수행한 전도자였고, 세속의 삶에서도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사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다닌 나라는 185개국, 복음을 전한 인구는 2억 명에 이른다고 언론은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48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100여 개 나라의 TV로 위성 중계됐습니다. 책과 라디오와 TV를 통해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수를 합하면 약 22억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18년 11월 7일, 미국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그다지 열성적인 기독교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7살 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소년 빌리는 한때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려는 꿈을 갖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설교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그였지만 어려서부터 말을 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을 많이 더듬었습니다. 그걸 고치기 위해 빌리 그레이엄은 자주 뒷산에 올라 나무들을 상대로 웅변을 연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무척 설득력이 있어서 18세 때는 세일즈맨으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남부 플로리다 성서신학교(Florida Bible Institute)와 중부인 시카고 근교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1940년, 남침례교회의 목사가 되면서 ‘하나님의 도구’로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의 이름은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30만 명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캔버스 대성당'이라고 알려진 대형 흰색 천막 아래에서 십자군 운동을 펼칠 때였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자서전에서 이때를 ‘인생의 분수령’으로 꼽고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과도 매우 가까이 지냈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이래 거의 모든 대통령의 영적 지도자였고 정치적 영향력도 컸습니다. 1969년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그레이엄 목사와 직통전화까지 개설해 놓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의 덕에 젊은 날 방황을 끝냈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선명한 복음주의 주장과 뛰어난 설교,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 거기에다 대통령의 영적 지도자로 굳어지면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위치는 단연 미국 교회의 최고봉이 됐습니다. 

대형 교회를 이룬 일부 목회자들은 나중에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그레이엄 목사는 세속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깨끗한 삶을 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가 80이 넘었을 때도 여성과 상담하려면 단 둘이 만나지 않고 반드시 제3자가 동석한 자리에서 했습니다.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는 폭로가 만연한 지금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그레이엄 목사의 행동을 본받아 아내 아닌 여성과 단 둘이 식사하지 않는 원칙을 지킬 정도로 미국인들의 신앙과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3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집회에는 1백10만 명이 운집했다.
1973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집회에는 1백10만 명이 운집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 성탄절 무렵 그레이엄 목사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5만 명의 신도들 앞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그를 직접 맞이했고 한국에서 싸우는 많은 미군 병사들은 그에게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20여 년 뒤인 1973년에도 한국을 방문해 여의도에서 11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인들에게 예수의 으뜸가는 가르침인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그레이엄 목사의 아내인 루스 그레이엄이 평양 외국인학교를 다닌 인연을 들어 이들 부부를 초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중국에 파견된 미국 의료선교사의 딸이었던 루스 그레이엄은 10대 시절인 1930년대 평양의 외국인학교에서 몇 년 동안 공부했었습니다.

1992년 4월 평양을 방문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운데)가 김일성 주석에게 자신의 저서와 성경을 선물했다.
1992년 4월 평양을 방문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운데)가 김일성 주석에게 자신의 저서와 성경을 선물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부시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성경책과 자신의 저서도 선물했습니다. 사실상 미 정부의 비공식 특사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김 주석의 특별 허가로 봉수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김일성 대학에서 강연도 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1994년 북핵 위기로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의 전쟁까지 계획했을 때 다시 한번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반공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이렇듯 북한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민간단체 ‘사마리아인의 지갑’을 통해 역시 북한 주민들을 꾸준히 돕고 있습니다.

유명세 때문에 그에게는 구설수도 많았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어떤 교회를 이단이 아니라고 말해서 미국 기독교계의 강력한 비판이 나오기도 했고, 구원론도 수용주의적인 면을 보여준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1991년 이라크 전쟁을 발표하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옆에 성경을 들고 서 있거나, 2012년에는 밋 롬니 대통령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롬니 후보가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는 모르몬교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장수를 누렸지만, 말년에는 각종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2005년에는 뉴욕에서 이제 직접 하나님을 뵙기를 바란다며 마지막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그 후 12년을 더 살다가 2018년 2월 21일 노스캐롤라이나 자택에서 타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