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참모들과 대화하고 있다.
미국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오른쪽 두번째)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참모들과 대화하고 있다.

이 시간에는 미국의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분열 위기에 놓인 국가를 통일하고, 노예해방이라는 위업을 남긴 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라디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노예해방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2)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취임하기도 전에 이미 남부 여러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1860년에 맨 처음 탈퇴를 선언하더니 그 다음 해가 되자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모두 7개 주가 링컨 취임 전에 줄줄이 연방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들 주는 남부연방을 의미하는 Confederacy라는 국가 체제를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남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국기도 달라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링컨 대통령의 취임 다음 해인 1861년에 미국 역사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버지니아도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에 가담했습니다. 

링컨이 나라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방법밖에는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지 불과 한 달 만인 1861년 4월 12일, 남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포트섬터라는 북군 요새에 포격을 개시했습니다. 양 측의 희생자는 없었으나 북군은 이 요새를 남군에 빼앗겼습니다. 4년 동안 60만 명의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는 처절한 전쟁, 즉 남북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격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북부 각 주에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전쟁 중 아메리카 연방에는 주로 동북부와 태평양 연안 서부의 23개 주가 있었고, 남부 연방에는 13개 주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해인 1861년에는 남군과 북군이 각각 약 20만 명 정도로 양측의 병력 규모는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1863년에는 북군이 약 60만 명, 남군이 약 20만 명으로 남군이 크게 열세였습니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로버트 리 장군의 뛰어난 작전으로 북군을 자주 위협했습니다. 처음에는 북군이 불리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군이 수세로 몰렸습니다. 

링컨은 전쟁이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든 1863년, 새해 첫날을 기해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연방정부로부터 떨어져 나간 주, 즉 남부 연방 소속 주의 노예를 전면 해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연방정부 소속 지역, 즉 북군 지역에는 총인구가 1천850만 명에 노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남부 연방에는 백인 550만 명과 노예가 350만 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 지역 주에 자유민이 250만 명, 노예가 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 총수는 약 400만 명이나 됐습니다. 

노예들은 면화, 담배,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라 불리는 대단위 농장에 일꾼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들에 의한 신체적 폭행과 고문 등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간혹 일부 노예는 주인이 착해 좋은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흑인들은 링컨 대통령에게 대단히 감사하고 존경을 표했습니다. 전쟁 중 북군에 자원입대한 흑인 병사의 수가 17만9천 명이나 됐던 걸 보면, 흑인들도 노예해방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링컨을 도와주려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북 전쟁의 결정전, 또는 전환점이 되는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 벌어졌습니다. 남북 전쟁에서 가장 처절했던 이 전투는 불과 사흘 동안 남북 군 합쳐 사망이 6천600여 명, 부상이 3만2천, 포로 또는 실종이 1만2천 명에 달했습니다. 남군 북군 모두 비슷한 사상자를 냈으나 결국 남군이 패하고 물러났습니다. 

처참한 싸움이 끝난 지 4개월 만인 11월 19일 전몰장병 국립묘지 헌정식에 참석한 링컨 대통령은 민주 정부란 어떤 것인가를 정의하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이 헌정식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뿐만 아니라, 싸우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바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북 전쟁은 게티스버그 전투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1865년 4월 9일, 아포마톡스 코트하우스 라는 곳에서 남군의 로버트 리(Robert E. Lee) 장군은 북군의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리 장군은 패장이지만 정중하면서도 군 사령관으로서의 위엄은 잃지 않았습니다. 항복 문서에 서명한 다음 북군 사령관인 그랜트 장군은 리 장군의 위상을 생각해 리 장군이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은 물론, 남군 장교들이 갖고 있던 말 등 개인 용품은 모두 소유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남군 병사들을 위해 많은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2차 임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겨우 지난 4월 14일 암살 당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금요일인 이날 오후, 링컨 대통령은 영부인 메리와 함께 워싱턴 시내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이때 한 남자가 대통령석 문으로 몰래 들어왔습니다. 이 남자는 대통령의 뒷머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대통령석에서 3m 아래에 있는 무대로 뛰어내렸습니다. 

암살범은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라는 이름의 배우였습니다. 부스는 무대 바닥으로 뛰어내려 “폭군을 죽여라!”고 소리친 다음 문밖으로 뛰어나가 말을 타고 사라졌습니다. 다음 날인 4월 15일 오전 링컨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대통령의 피살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미국인들은 검은 천을 문 앞에 걸고 조의를 표했습니다. 심지어 남부에서까지 원수인 링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애도 메시지가 쇄도했습니다. 

링컨이 암살당하고 며칠 후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사람은 대부분 체포되고 주범인 부스는 숨어다니다 며칠 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숨졌습니다. 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4명에게는 사형, 3명에게는 종신형, 한 명에게는 6년형이 선고됐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유해는 백악관과 국회 의사당으로 옮겨졌습니다. 

시민들은 고인을 참배하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해는 특별열차에 실려 고향인 일리노이로 돌아갔습니다. 

열차가 서는 도시마다 사람들은 철로 변에 늘어서서 마지막 가는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군중들은 열차가 천천히 지나갈 때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떠나 보냈습니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도 열차가 지나갈 때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대통령의 시신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한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링컨이 떠난 지 올해로 143년이 됐지만 링컨의 영묘에는 수학여행 온 어린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중 추모객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에는 연간 6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링컨의 탄생일에 가까운 2월 셋째 주 월요일을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로 정하고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