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얀마 여성을 위한 바자회에 참석한 마이라 다가이포(왼쪽).
지난달 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얀마 여성을 위한 바자회에 참석한 마이라 다가이포(왼쪽).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유난히 용기가 많은 사람이 있죠. 보기엔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을 과감하게 도전해서 해내는 사람이 있는데요. 오늘의 주인공도 보기엔 자그맣고 평범한 여성이지만, 40여 년의 인생 여정을 들어보면 용감한 여전사가 따로 없습니다.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잃고, 살기 위해 홀로 강을 건넌 소녀. 난민촌에 정착한 후, 또 혼자 미국 땅을 밟은 여성, 바로 마이라 다가이포 씨입니다.

라디오
마이라 다가이포 (1)

 

[현장음: 미얀마 교회 예배현장]

워싱턴 DC의 유서 깊은 한 교회. 그런데 교인들의 생김새도, 언어도 일반적인 미국 교회와는 좀 다릅니다. 이 교회는 오전에는 미국인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오후에는 미얀마인들이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린다고 했죠.

[현장음: 미얀마 여성 돕기 바자 행사]

미얀마인 예배가 끝나자마자 곧 시끌벅적한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이날은 특별한 모금 행사가 열렸는데요. 밝고 씩씩한 목소리로 바자회 물품을 사는 여성, 바로 오늘의 주인공 마이라 다가이포 씨였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이가포] “이 행사는 교회 여 성도회가 주최하는 모금행사인데요. 미얀마에 있는 여성 중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 또 신학교에 가려고 하는 여성들을 돕기 위한 행사에요. 미얀마의 고아원에도 후원금을 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지금 미얀마 전통 음식을 팔고 있는 거예요. 미얀마 전통 차를 한번 마셔보시겠어요?”

[현장음: 미얀마 여성 돕기 바자행사]

따뜻하고 달짝지근한 미얀마 전통 차를 건네는 마이라 씨, 이런 모금행사가 무척 익숙해 보였는데요. 마이라 씨가 하는 일을 들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이가포] “저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카렌 족 출신이고요. 미국에서 하는 일은, 인권 운동가이자 미얀마 이민사회 지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미국 버마 운동(US Campaign for Burma)’이라고 하는 미얀마 인권단체 정책국장으로 일하고 있고요. 카렌계 미국인 협회 의장과 세계 카렌인 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관심 분야는 카렌족에만 국한되지는 않고요. 미얀마에 거주하는 많은 소수 민족의 인권을 알리는 일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동남아국가 버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미얀마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이제는 국제 사회도 대부분 미얀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민들은 여전히 모국을 버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군부에 대한 반감이 남아있고 또 소수 민족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죠. 자치를 주장하는 카렌족 역시 오랜 기간 군부의 탄압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저는 미얀마 동부 카렌족 거주지역에서 태어났는데요. 태어날 때부터 군부정권의 탄압으로 집을 잃고 떠도는 ‘내부 난민’이었습니다. 카렌족 거주지역엔 교육이나 보건 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어요. 당연히 학교도 병원도 없었죠. 대신 끊임없이 총성이 오가는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미얀마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카렌 군인들이 돌아다니며 도망치라고 외쳤죠. 그럼 서둘러 짐을 챙겨 마을을 떠나야 했어요. 그렇게 정글에서 며칠씩, 길게는 1달 내내 머물기도 했습니다. 내부 난민이니까 말 그대로 살 곳이 없었던 거에요.”

마이라 씨는 어린 나이에 겪은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미얀마 군부는 너무 잔인했어요. 군인이 와서는 동네를 모두 불태웠죠. 또 광물이 많이 나는 지역을 장악하고는 광산을 운영했어요. 그래서 계속 거주지를 옮겨 다니다가 결국엔 태국과의 국경 지역까지 오게 된 겁니다. 미얀마와 태국 국경을 가로지르는 살윈 강을 건너면 태국 땅이었죠. 하지만 저는 태국 사람이 아니니까 강을 건널 수도 없고, 미얀마에서도 살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이라 씨는 하지만 카렌족 정부지역에 살면서 잠시나마 안전한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자치권을 주장하며 정부군과 전쟁을 벌여 온 카렌족은 ‘카렌민족해방군’이라는 정부를 세웠습니다. 교육부, 보건부, 경제부 이런 부서를 갖춘 정부 조직이었죠. 전 카렌정부 지역에서 살게 됐는데 어린 저에겐 정말 완벽하고 안전한 곳이었어요. 하지만 1995년에 미얀마 군부독재가 군대를 보내서 카렌정부 지역을 장악했어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저는 다시 또 국경으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살윈 강을 넘어 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현장음: 미얀마 국경지대 살윈 강]

살윈 강을 넘을 당시, 마이라 씨는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저는 어린아이일 때 미얀마 군부에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형제들도 다 헤어졌고요. 삼촌이 있었는데 삼촌 자녀만 5명이었거든요. 우리 4남매를 다 먹여 살리실 수 없었죠.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는 다른 마을로 다 흩어졌어요. 제일 큰 오빠는 다른 마을로 갔는데 오빠와 오빠의 부인, 그리고 딸이 미얀마 군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마지막이에요. 다른 형제 둘은 20년 후에 성인이 되어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죠.”

10대 소녀의 몸으로 홀로 강을 건넌 마이라 씨의 난민촌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녹취: 태국 난민촌]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유엔난민기구(UNHCR)의 도움으로 태국 정부가 인정하는 카렌족 난민촌이 세워졌습니다. 전 거기서 수년을 살았는데요. 수십 년씩 대를 이어 살아오는 난민들도 있었죠. 유엔난민기구로부터 정식으로 난민증을 받았고 또 여러 구호 물품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카렌 난민촌 사람들은 일정 기간 지나고 나면 난민신청을 할 수 있었어요. 신청서를 작성하고 보안 심사와 건강 심사 등을 거친 후 어디로 가게 될지 유엔난민기구가 결정했습니다. 주로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나라가 최우선이었는데요. 제 경우에는 미국에 있는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2004년에 미국에 난민으로 오게 됐습니다.”

미국의 대도시 뉴욕에 정착하게 된 마이라 씨는 미국에 오자마자 바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정식 학교라곤 한 번도 다녀보지 못한 마이라 씨,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했듯,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습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미얀마 출신 인권운동가 마이라 다가이포 씨의 첫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마이라 씨의 미국 정착과정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