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장마당 등 시장이 출현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미국의 북한경제 전문가들은 최근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북한 정부의 경제개혁 정책이 북한 내 시장 출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며 이같이 지적했습니다. 이연철 기자가 보고서 내용을 자세히 전해 드립니다.

북한에 시장이 출현한 것은 정부가 주도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의 실패 (state failure)'에 따른 민간인들의 대응에 따른 것이라고 미국의 북한경제 전문가들이 밝혔습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 샌디에이고 대학의 스테판 해거드 교수와 워싱턴 소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마커스 놀란드 연구원은 지난 해 8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3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같이 주장했습니다.

북한 내 시장의 출현은 지난 1980년대 말부터 구 소련과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로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고, 1990년대 중반 20세기 최악의 기아 사태를 겪는 동안 정부가 사회주의 배급체제를 통해 식량을 제공할 수 없게 된 데 따른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가정과 직장, 지방 당 조직, 정부 기관 등 북한 내 소규모 사회경제 단위들이 식량 확보를 위해 법률적으로는 불법인 시장경제 활동에 착수하면서 장마당 등 시장을 통한 거래가 이뤄지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보고서는 북한의 이른바 '8.3노동자' 즉, 공장에 돈을 바치면서 출근을 면제받고 대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노동자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이 법으로 허용된 테두리를 넘어 활발한 시장경제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설문조사에 참가한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북한을 떠날 당시를 기준으로 소득의 상당 부분이 시장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은 거의 모든 소득이 개인적인 장사 활동에서 나왔다고 답했습니다. 또한 이들을 포함해서 소득의 절반 이상이 장사에 의한 것이라는 사람이 응답자의 3분의 2를 넘은 반면, 시장에서 전혀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람은 4%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북한의 주요 경제정책들은 시장경제 출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북한의 기아 사태 와중에 아래로부터 시작된 이 같은 시장지향적 행동 방식이 정부 정책의 변화와 관계없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고서는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개혁인 2002년의 '7.1경제관리 개선 조치'가 과거 10여 년 간 계속 증가한 일반 주민들의 불법적인 시장경제 활동 중 일부를 합법화 시켜주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조치 이후 시장 활동이 늘어났다고 응답한 탈북자는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북한 정부가 국가배급 제도를 다시 도입하고 국내시장과 국경 무역에 새로운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에도 시장화 과정에서 근본적인 후퇴는 없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습니다.

보고서는 이와 함께 이번 탈북자 설문조사를 통해 북한 정부의 7.1조치가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부패를 초래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북한 정부의 정책 변화가 물질주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고 응답한 탈북자는 92%, 부정부패와 관련시킨 탈북자는 89%,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시킨 탈북자가 84%로, 이는 북한 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의미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소리 이연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