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앞으로 미-북 간 핵 협상의 중대한 기반이 될 것으로 미국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핵 협상이 본격 재개되려면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재확인하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습니다. 김연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전문가들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야말로 미국과 북한 간 대화의 물꼬를 다시 트는 역할을 맡는데 이상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말입니다.

미-북 관계와 관련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또 미국이 그동안 알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는 미국을 8년 간 이끌었고 현 국무장관의 남편이기도 한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제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만남이 앞으로 오바마 행정부의 효과적인 새 대북정책 입안에 중대한 기반이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미국 정부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미국인 여기자들의 석방을 위해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신분을 감안할 때 핵 문제를 비롯한 미-북 관계 전반에 관해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를 나눴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 일변도가 아니라 광범위한 전략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미-북 관계가 급진전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클린턴 전 행정부 시절 국무부 북한 담당관을 지낸 조엘 위트 씨입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만남 이후 미국과 북한이 핵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로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뜻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 1990년대 미국과 북한이 핵 협상을 벌일 당시만해도 북한은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에 큰 관심을 보였던 반면, 지금은 핵무기 보유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위트 씨는 지적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단지 협상에 복귀하는 것만으로는 보상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분명히 해왔습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 의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싱턴의 민간 연구소인 스팀슨센터의 앨런 롬버그 선임연구원입니다.

미국과 북한 간 핵 문제 논의를 위한 공식 회동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핵 협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서 협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 분명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버그 연구원은 북한이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라는 전제 아래 북한 측과 마주 앉는 것은 미국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반면 미국과 북한이 어떤 식으로 양자회담을 가질 것인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봤습니다. 양측이 만날 의지만 있다면 형식에서는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수 차례 공언했고, 미국은 6자회담 틀 안에서만 북한과의 양자회담이 가능하다고 밝혀왔습니다.

한편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이 성사된 데는 북한의 다양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브루킹스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박선원 박사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외부 인사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점, 그 다음에 핵 문제 논의 이전에 여기자 문제를 놓고 사전에 과연 오바마 행정부하고 핵 문제를 놓고 협상이 가능한지를 타진할 수 있는 카드로 쓸 수 있다는 점…”

미군 해군분석센터(CNA)의 켄 고스 외국지도부 연구 담당 국장도 북한 측이 김정일 위원장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만남을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북한의 입장도 직접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고스 국장은 북한의 식량 사정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 만큼 어느 시점에 가서는 외부 지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은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이 재개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일본 내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문이 “여기자 석방을 위한 실무적인 수속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