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대통령이 오는 20일 미국 제43대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납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12일부터 부시 행정부 8년의 대북정책을 돌아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이연철 기자와 함께 지난 8년 간의 대북정책 전반을 살펴보겠습니다.

진행자 = 이연철 기자, 전임 클린턴 행정부 말기 때만 해도 미-북 관계 개선의 기대가 높았는데요,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죠?

이= 네, 2001년 1월20일 취임한 부시 대통령은 이른바 ABC (Anything But Clinton), 그러니까 `클린턴 행정부의 것은 어떤 것도 안 된다'는 기조 아래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2001년 6월, 부시 대통령은 포괄적 접근법에 따른 대북 대화 재개를 발표하면서, 북한 핵 동결에 관한 제네바 합의 이행,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검증된 규제와 수출금지, 재래식 군비위협 축소를 대북정책의 주요 의제로 설정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같은 해 9월11일,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발생했습니다

진행자= 9.11테러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더 강경해지는 계기가 됐죠?

이=그렇습니다. 9.11 테러로 이른바 네오콘으로 불리는 신보수주의들이 득세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도 더욱 강경한 쪽으로 흐르게 됐습니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존 볼튼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 등 부시 행정부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네오콘은 북한 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02년 1월29일, 부시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을 이루는 국가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이 미국을 위협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진행자 = 이런 가운데, 제2차 북 핵 위기가 불거졌죠?

이= 네, 2002년 10월, 부시 대통령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북한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시인했다고 말하면서 2차 북 핵 위기가 불거졌습니다. 미국은 이를 제네바 합의 위반 행위로 간주하고 매년 50만 t 씩 북한에 제공하던 중유 공급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진행자 = 이 무렵에 미국 정부가 군사적 대응을 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왔지요.

이= 네, 실제로 2002년 12월24일,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군사적 대응도 불사할 것임을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31일, 북 핵 문제를 외교적 방법으로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어 2003년 1월14일에는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그 대가로 에너지와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부시 행정부는 북 핵 문제를 관련국들과의 다자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003년 4월 중국이 미-북 간 중재자로 나서면서 베이징에서 3자회담이 개최됐고,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 한국이 참가하면서 6자회담이라는 다자구도가 마련됐습니다.

진행자 = 하지만 6자회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나올 때까지 약 2년 동안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요?

이= 그렇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견해차가 워낙 컸기 때문인데요, 미국은 북한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요구했습니다. 반면, 북한은 미국이 먼저 적대정책을 철회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이런 가운데, 2004년 5월에는 북한과 리비아 간 핵 협력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또 10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인권법에 서명하는 등 미-북 간 갈등이 계속됐습니다.

진행자 = 부시 대통령은 2004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2005년부터 제2기 집권을 시작했는데요, 대북정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죠?

이= 네, 2기 부시 행정부는 대북 강경책이 북 핵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6자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책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1월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표현해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샀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3월20일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 고위 관리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했습니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이 전략적 선택을 하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 9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북 핵 문제 해결의 청사진을 담은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습니다.

진행자=하지만 곧바로 교착상태가 이어졌는데요, 그 이유가 뭡니까?

이= 네, 9.19 공동성명이 나오기 직전, 미국 재무부는 북한이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 BDA 은행을 통해 위조 달러화를 유통시키고, 마약 거래대금 등 불법자금을 세탁한 혐의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대북 인권특사를 임명해 북한 인권 문제를 공론화했고, 위폐 문제를 제기하면서 금융제재를 가하는 등 대북 압박 수위를 높였습니다. 북한은 2006년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을 잇따라 단행하면서 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진행자 = 미국이 초강경 대북정책을 들고 나올 것이라는 게 일반의 예상이었는데요, 결과는 정반대였지요?

이= 네, 북한과의 협상을 강조하는 민주당이2006년 11월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의회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변화의 전기가 마련됐기 때문입니다. 공화당 내 강경파들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사임하는 등 대북강경책을 주도하던 네오콘들이 대거 퇴진하면했서 부시 행정부 내에서 대북 협상론이 힘을 얻게 됐습니다.

진행자 = 이런 상황에서 백악관과 국무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북전략이 마련됐군요?

이=네, 2006년 5월, 필립 젤리코 국무장관 정책보좌관은 이른바 젤리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요, 핵 문제 해결 전이라도 6자회담과 병행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별도의 협상을 개최하자는 내용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6년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종전 선언 구상을 밝혔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 계획을 포기하면 북한의 안전보장에 대한 협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 이런 가운데, 2007년에 2.13 합의와 10.3 합의가 이뤄졌는데요,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죠?

이= 그렇습니다. '2.13 합의'가 타결됐지만, BDA 북한 자금 송금 문제로 당초 합의 시한인 60일보다 3개월이나 더 지난 7월14일에야 북한이 영변 핵 시설 가동 중단에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또 '10.3 합의'를 통해 2007년 말까지 핵 신고를 완료하기로 했지만, 마감시한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핵 신고가 지연되면서 미국 내 일부 강경파들은 북한에 대해 보다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미국 백악관은 6자회담을 통한 해결방식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진행자 =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08년에는 미-북 관계에 획기적인 일들이 많았죠

이= 네, 2월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이 이뤄졌습니다. 5월에는 미국 정부가 북한에 50만 t의 식량을 지원한다고 발표했습니다. 6월에는 북한에 대한 적성국 교역법 적용이 종료됐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할 것이라는 행정부의 의사가 의회에 통보됐습니다. 그리고, 10월11일,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공식 해제했습니다.

미 국무부의 션 맥코맥 대변인은 국무장관이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을 무효화했다며, 장관의 서명으로 조치가 발효됐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이같은 조치는 미-북 관계의 진전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평가됐습니다.

진행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시 대통령은 비핵화 2단계도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됐죠

이= 그렇습니다. 임기 내 북 핵 문제 해결을 다짐했던 부시 대통령은 최소한 비핵화 2단계 조치만이라도 마무리하고 물러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시료 채취를 포함한 검증 문제가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으면서, 결국 비핵화 2단계 조치도 완료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에 북 핵 문제 해결을 넘기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