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 해,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가장 자주 보도된 북한 관련 뉴스는 핵 등 안보 현안, 탈북자 등 인권 문제, 그리고 식량난이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2008년을 마무리 하면서 이들 분야에서 올 한 해 가장 두드러진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차례로 나눠 보내드리는 '2008년의 얼굴들' 오늘은 대북 식량 지원에서 주된 역할을 한 면면들을 살펴봅니다. 조은정 기자입니다.

미국 정부는 지난 5월 북한에 대한 50만t 식량 지원을 결정하기에 앞서 북한에서 오랫동안 구호사업을 벌여온 비정부기구 NGO들의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이 때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 민간 구호단체 '월드 비전'의 빅터 슈(Victor Hsu) 북한 담당 국장은 눈에 띄게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슈 국장은 대북 사업을 벌여 온 여러 NGO들에 미국 정부의 식량 분배를 맡게 될 가능성에 대비하도록 알리는 한편, 미 국제개발처 USAID를 포함한 미국 정부 측에는 NGO들이 식량을 정확히 전달할 준비가 돼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대북 지원을 결정한 미국 정부는 '월드 비전'과 '머시 코어' 두 단체에 식량 분배를 위한 NGO 연합체 구성을 요청했습니다. 슈 국장은 '머시 코어' 관계자와 함께 일정 기준에 맞는 NGO들을 선정해 합류 의사를 타진한 뒤 `사마리탄스 퍼스', '글로벌 리소스 서비스', '조선의 그리스도인 벗들'의 참석을 이끌어 냅니다.

미국 정부의 식량 지원 발표 2주 뒤인 5월 29일, 슈 국장은 평양의 북한 외무성에서 구체적인 식량 분배 이행 조건을 놓고 북한 당국과 협상을 벌입니다. 이 협상에는 슈 국장 외에 다른 NGO 관계자들과 미국 국무부, 국제개발처 당국자들, 그리고 세계식량계획 WFP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나흘째인 마지막 날에는 12시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새벽 4시에 회의를 마쳤다는 슈 국장은 무엇보다 식량의 도착에서 배분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구체적 이행 요건들에 대해 북한 당국과 미리 합의할 수 있었던 점에 큰 의미를 뒀습니다.

슈 국장은 "우리는 북한이 식량 지원 양해각서(Letter of Understanding)를 준수하겠다고 합의한 데 대해 완전히 감격했다"며 "양해각서는 북한이 구호단체들을 대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빅터 슈 국장이 처음 대북 인도주의 사업에 뛰어든 것은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슈 국장은 1995년과 96년 북한에서 큰물 피해가 난 이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로부터 지원을 처음 요청 받았다고 회고합니다. 당시 국제 기독교 구호단체인 '처치 월드 서비스' (Church World Service)의 아시아.태평양 담당이었던 슈 국장은 이 때부터 북한을 빈번히 방문해 미국에서 전달되는 식량의 도착과 분배를 점검합니다.

슈 국장은 이후 90년대 후반 세계식량계획 평양사무소 산하 '식량지원연락단'(Food Aid Liaison Unit)의 NGO 운영위원장도 맡게 됩니다.

슈 국장은 "북한 측 당국자들과 오랫동안 일을 했는데, 그들이 요즘 들어 분배 감시 기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훨씬 높아졌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타이완에서 태어나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남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자란 빅터 슈 국장은 이후 예일대학 신학원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세계교회협의회에서 10여년 간 유엔과 비정부기구 관련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어 70년대에 제네바에서 북한 당국자들과 처음 접촉을 시작했고, 92년 8월에는 미국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기도 했습니다.

슈 국장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식이며 도움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도와야 한다"면서, "비록 북한 내 활동이 어렵긴 해도 북한 주민들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 피에르 드 마저리 세계식량계획 전 평양사무소장도 올 한 해 북한의 식량난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강력히 호소한 사람입니다.

드 마저리 사무소장이 베이징과 서울 등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하는 발언은 전세계로 긴급 타전됐습니다. 세계식량계획은 북한 식량 상황과 관련해 가장 공신력 있는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2006년 9월 취임해 지난 10월 말까지 평양사무소장으로 근무한 드 마저리 씨는 퇴임 직전까지 북한의 식량난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드 마저리 사무소장은 10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 가구의 70%가 올해 식량 섭취를 줄여야 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두 끼를 먹는다"고 전했습니다.

캐나다 출신인 드 마저리 전 소장이 세계식량계획에서 15년을 일할 수 있게 한 힘은 자신의 일을 통해 "상황이 진전되고 달라지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입니다.

캐나다 국제개발청 CIDA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 WFP에 몸 담은 드 마저리 소장은 분쟁지역을 특히 많이 경험했습니다. 1994 WFP 첫 근무를 인종대학살이 벌어진 르완다에서 시작했고, 이후 내전 중인 동티모르와 미국 침공 직후의 이라크, 그리고 내전 중인 네팔에서 근무했습니다. 드 마저리 소장에게 북한은 또 다른 시험이었습니다.

드 마저리 소장은 "지난 2년 간 아주 독특한 환경 속에서 식량 원조 활동을 했으며 북한에서 내 자신의 한계에 도달해보기도 했다"면서 "새로운 상황에서 스스로를 시험해 볼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북한 당국과 벌인 식량 분배와 감시 협상은 드 마저리 소장에게 북한 근무 중 가장 큰 성과이자 도전이었습니다.

드 마저리 소장은 WFP 소속 인원을 59명으로 늘리고, 한국어 요원이 포함되도록 북한 당국과 합의한 것은 WFP의 대북 협상에서 전례 없는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드 마저리 소장은 북한을 떠나면서, 앞으로 북한 당국과의 협조관계가 개선돼 인도주의적 지원이 더욱 원활히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