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과 전세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국가가 북한 땅에서 처음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북한을 포함해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미국의 세계적인 교향악단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이 열린 26일 오후, 공연장인 동평양 대극장에 모인 북한 관객들은 미국의 국가가 울려퍼지는 동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표했습니다. 김연호 기자가 좀더 자세한 소식 전해드립니다.

북한 국가인 ‘애국가’가 연주되자 동평양 대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모두 일어섰습니다.

이어 미국 국가가 연주됐습니다. 미국의 국가가 북한 땅, 그것도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는 평양 한복판에서 울려퍼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공연실황이 남북한과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무대 좌우에는 미국 성조기와 북한 인공기가 게양됐습니다. 북한 측은 미국 국가의 제목을 ‘별이 빛나는 깃발’로 지칭했습니다.

그동안 북한 당국은 미국을 적대적인 침략자로 선전해왔습니다. 그러나 꽉 막혔던 미국과 북한 간의 핵 협상이 진전을 보이면서 양측의 문화교류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이번 평양 공연은 이른바 ‘오케스트라 외교’로 불리며 미국과 북한 간의 적대관계 해소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습니다. 지난 1970년대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선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이번 공연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미국인들은 뉴욕 필하모닉 단원들을 비롯해 가족과 후원자, 취재진 등 모두 2백 80여 명으로, 지난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의 방문단보다 3배 정도 큰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뉴욕 필하모닉은 이날 오후 6시부터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된 공연에서 미국적인 색채가 강한 곡들을 북한 관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신세계 교향곡’은 1893년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이 미국 신대륙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을 담은 작품이고, ‘파리의 미국인’은 작곡가 조지 거슈윈이 파리를 여행하면서 미국인으로 느낀 감상을 표현한 곡입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로린 마젤 상임지휘자는 ‘파리의 미국인’을 연주하기에 앞서 관객들에게 농담을 했습니다.

마젤은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되면 언젠가 ‘평양의 미국인’이란 제목의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지난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과의 접촉이 급증하면서 서서히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국제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에서 조금씩 외부세계에 눈을 뜨고 있으며,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 같은 문화행사가 많아질수록 북한의 개방을 더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지적입니다.

반대의 시각도 있습니다. 한국 동서대학의 북한 정치선전 전문가인 브라이언 마이어스 씨는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에는 미국인들에게 미-북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북한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주장합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북한주민들에게 지속적으로 반미주의를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김 위원장은 단순히 해외의 원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지도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한편 이번 공연에는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과 미국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 등 북한과 미국 측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음악광으로 알려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평양 공연을 끝낸 뉴욕 필하모닉은 서울 공연을 위해 27일 아시아나 항공 특별기편으로 한국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