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북한에서의 끔찍했던 생활고에 이어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들의 사연을 중국과 일본 현지취재를 통해 연속기획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어제,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 일본인 처의 사연을 전해드린 데 이어 오늘은 그 두번째 순서로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몇 해 전 탈북해 일본에 정착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고국 일본을 떠났던 이유와 다시 북한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북한에서의 생활상 등을 전해드립니다. 서지현 기자의 보도입니다.

김박순과 전옥춘.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이름이 돼 버렸습니다.

40여 년 간 불려온 '내 이름'인데, 이제 일본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김박순과 전옥춘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이토 히로코와 우에다 즈타에. 두 사람이 어머니, 아버지가 주신 진짜 '내 이름'을 되찾기까지는 꼬박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조선에 가면 잘 살고 그런 소리 많이 듣고 남편 가니까, 3년 있으면 여기 온다는 소리도 듣고 그러니까 3년쯤은 기다릴 수 있겠고...”

사이토 히로코 씨가 일본을 떠나던 해, 풋풋한 스무 살이었습니다.

조총련은 조선은 '지상락원'이라며, 3년만 지나면 일본에 돌아올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조선은 교육도 의료도 무료다', '어떤 차별도 없다', '누구나 동등하게 살 수 있다'는 선전에 일본에서 갖은 수모와 차별, 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과 그들을 사랑했던 일본인 아내들은 미련 없이 배에 올랐습니다.

조총련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북한과 일본 정부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1959년 12월14일, 9백75명의 재일동포를 태우고 청진항을 향해 출항한 '제1차 귀국선' 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1984년까지 모두 1백86 차례에 걸쳐 9만3천 여 명의 재일 조선인과 그들의 일본인 아내들이 일본을 떠났습니다.

당시 재일 조선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던 일본 정부 역시 이들의 강제추방을 계획하고 있다가 조총련의 이같은 북송사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씨는 부모와의 연은 끊어도, 자식과의 연은 도저히 끊을 수 없었기에 조선인 남편을 따라 귀국선에 올랐다고 47년 전을 회고합니다.

우에다 즈타에: “세 살짜리 아이 하나 데리고 갔는데 그 아이만 없으면 안 갔죠. 그런데 나도 조그만할 때 아버지 없이 살았으니 어쨌든 새끼 보고 가야 된다고... 형제 부모는 다 반대했어요.”

1960년 6월, 제25차 귀국선에서 북한 청진항에 발걸음을 내딪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그 후로 40여 년이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배에서 내릴 때, 그 때 보고서... 아휴 이거 고생하러 왔구나 생각이... 사람들 입고 온 옷 보고... 이게 무슨 지상락원이라고 그런 나라라고 해서 갔는데, 이게 무슨 나라야. 이거 우리 고생하러 왔구나... 아이들은 위에만 입고..”

북조선에서의 40여 년.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아... 제일 힘든 것은... 먹을 거요. 배급 주는 게 2, 3년? 그 다음에부터는 전혀...  70년 그 때까지는...”

사이토 히로코: “이제야 배급은 하나도 안 주죠. 아예 없어요. 올 때도 안주고, 그 전에도 안줬어요. 별로 일이라는 건 없고... 야메 장사를 하고 살았어요.”

조국 일본 땅에서라면 겪지 않았을 배고픔,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뭐 아들이 죽는 것 많아요. 길가에서 하루에 몇 명씩 보는지 몰라요.”

특히나 마음을 나눴던 같은 처지의 일본 사람들이 굶어 죽어 무덤도 없이 내동댕이 쳐지는 것을 보면서 1960년, 그 해, 그 배를 탔던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정말 못 보겠어요. 먹을 것 없고, 봐주는 사람 없고, 조선에서는요. 자기가 자기 벌어서 먹어야 먹고, 자기가 벌지 못하면 못 먹고 굶어죽어야 돼요.”

그러나 마음먹기만 수 년, 일본 땅을 실제로 다시 밟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에다 즈타에: “갈 수 있으면 나도 가고 싶다고 매일이다시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 '98년도에 국경까지 왔다가 너무 비가 와서 못가고, 2년 후에 또 한 번 왔다가 또 못 가고, 3번만에 성공해서... 가다가 붙잡히면 죽어야겠다는 각오로. 일본에까지 땅 밟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는 생각으로 왔죠. 산으로 넘어왔댔어요.  산으로 넘어 하룻밤 눈 속에 걸었댔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조국 일본.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미 돌아온 자신들은 괜찮다고 해도, 아직 북한에 남아 굶주리고 있는 다른 일본인들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면 한 숨만 나옵니다. 

우에다 즈타에: “지금도 거기 남아있는 일본 사람 나이 많잖아요. 아프신 분도 계시고요. 일본 사람이 우리 살던 부락에 6명 있었어요.내가 올 때 둘이 남아있었어요.”

일본 정부가 그토록 애를 쓰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우에다 즈타에, 사이토 히로코: “랍치 사례, 그 사람들만 많이 신경 쓰고 있죠. 그걸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귀국자들이, 일본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와서, 그럼 그 안에서 메구미라는 여자를 아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 통해서 아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를(일본인 처를) 빨리 도와주고, 북조선에 있는 사람들을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오게끔 해야 한 사람이라도 들어오게끔... 안타깝단 말입니다.”

40여 년 전 그 배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조선 남자를 사랑해 그를 따라 갔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가슴에 응어리를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사이토 히로코: “이제 안 죽고 남아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일본에 와서 부모 형제를 만나기를... 우리도 이렇게 힘쓰고 있는데...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고조 나이 다 잡순 사람이 많으니까... 그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일본에 가고 싶은 사람 오고, 조선에 자식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냔 말입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 드리는 특집기획 '제 3의 탈북자-일본인 처', 내일은 그 세번째 순서로 사이토 히로코 씨와 우에다 즈타에 씨가 일본에 정착한 이후에도 언어와 사회 적응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정을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