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관리소로 불리는 정치범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라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북한 당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북한 평안북도 14호 개천 관리소를 탈출해 완전통제구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에 정착한 탈북자 신동혁 씨는 최근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인터뷰에서 관리소에서 변화를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관리소에서 겪은 경험을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인 신동혁 씨를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대인 수 백만명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은 뒤 집단학살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용소 근처에 살던 주민들은 바로 옆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강제노동과 독가스로 끔찍하게 죽어간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일반주민들 역시 한번 수용되면 살아서는 도저히 나갈 수 없다는 관리소 완전통제구역의 실체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검은 장막에 깊숙히 가려져 있는 북한 관리소 완전통제구역이 지난 2005년 평안북도의 개천관리소를 극적으로 탈출한 탈북자 신동혁 씨에 의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 씨는 개천관리소 한 곳에만 대략 4만명 이상이 수용돼 있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정확한 인원수는 모르겠지만 고저 4만명에서 5만명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일하던 공장에만 거의 2천명이 됐으니까… 많지요.”

신동혁 씨는 관리소에서 표창결혼을 통해 맺어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10살 때까지는 어머니, 그리고 이후에는 아버지 등 다른 남성 수감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로 버려진 개천관리소 사람들은 북한의 보통 사람들과 달리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등 사상교육을 받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강제 노동에 투입된다고 신 씨는 말합니다.

“인민학교에 입학했던 6살 때부터 공부 끝나고 오후 때마다 내내 일하러 나갔거든요. 도로닦기라든지 농촌지원, 탄광에 가서 탄을 모아주는 일 같은 거요. 그리고 11살 때부터 고등중학교 올라가서는 수업이 전혀 없고 17살 때까지 수업이라는 것은 아예 없고 전문적으로 일하러만 다녔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사랑을 받고 나누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우기 보다 기계적인 생활을 반복했기 때문에 신 씨는 자신의 노예 같은 삶에 대해 의문조차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전에는 아예 그런 생각을 못하고 살았거든요. 엄마나 형이 그렇게 총살될 때도 관리소가 나빠서가 아니라 엄마하고 형을 원망했거든요. 엄마하고 형이 그런(탈출) 죄를 졌기 때문에 내가 이런 고생을 했다고 생각했지 관리소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만 보아왔으니까요.”

관리소 사람들은 처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자기 속내를 들어내지도 않는다고 신 씨는 말합니다.

“저만해서는 우리가 남한테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우리가 처벌받거나 심할 경우엔 총살을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저만해서는 우리가 남한테 속을 주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거든요”

한 마을을 집단적으로 요새화시킨 북한 내 관리소는 개천(14호)을 비롯해 회령(22호), 화성(16호), 요덕(15호), 북창(18호), 청진(25호) 등 적어도 6곳 이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형기를 채우면 석방이 가능한 혁명화 구역이 있는 15호 요덕관리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소는 모두 완전통제구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동혁 씨는 개천관리소에서 1년에 3~4번 정도 공개처형을 실시한다고 말합니다.

“매회 봤습니다.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썼는데 교수형하고 총살형이거든요. 보통 1년에 3~4번 정도 하구요. 가장 많이 했을 때 보면 5명 정도구요. 보통 2~3명 정도 처형합니다.”

신 씨는 공개처형 외에 수용소 내 많은 사람들이 자살과 지나친 노동으로 인한 안전사고와 과로사, 또는 굶주림으로 죽어간다고 말합니다.

국제인권단체들과 미국 국무부의 연례 인권보고서는 북한 관리소에 적어도 20만명 이상이 수용돼 있으며 수감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인권탄압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북한 관리소에 관한 새 보고서 ‘잔인함의 집결’에 따르면 관리소는 수감자 사망률이 지나치게 높고 연좌제 등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탄압을 받는가 하면, 여성 수감자들이 경비원과 관리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등 반인도적 범죄행위의 온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수 년전부터 이런 보고서를 발표하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개입과 함께 북한 정부에 수용소 환경을 개선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동혁 씨는 그러나 자신이 관리소를 탈출한 2005년 초까지 아무런 변화를 목격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 우린 그런 것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무슨 처벌이 약해지고..그런 거 전혀 모르고 지냈습니다.”

최근 대북 인권단체들은 또 북한 내 기독교인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관리소에 수감되는 기독교인들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동혁 씨는 적어도 개천관리소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와 관련해서도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신 씨는 기독교인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배경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인척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나치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나 굴라그로 불리는 구소련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의 실상은 수감자들의 일기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신동혁 씨는 관리소에서 몰래 일기를 쓰던 어른들을 본 기억이 있다며, 아마 그 일기장이 세상에 공개되면 관리소 실상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예 있습니다. 대체로 어른들이 일기 같은 것을 씁니다. 그 분들은 대체로 보면 40대 이상 분들은 거의 다 밖에서 오신 분들이니까. 그 분들이 두 분인가 몰래 쓰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신씨는 22살이던 2004년 군복을 만드는 피복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한 남성을 통해 처음으로 중국 등 외부소식을 접한 후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1월 2일 평생 갇혀 지내던 관리소를 탈출해 중국에서 1년 6개월여를 보낸 뒤 꿈에 그리던 자유의 땅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신 씨는 조만간 자신의 관리소 체험을 생생하게 담은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