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국이 지원한 쌀을 군량미로 전용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남성욱 교수가 평양을 출입하는 중국 소식통으로 부터 입수했다는 이 문건에는 농업생산 실적을 허위보고한 당 간부들에 대한 징계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취재에 김근삼 기자입니다.

고려대학교 남성욱 교수가 4일 공개한 문건은 김정일 위원장이 군수동원 총국장에게 내린 지시사항을 담은 말씀자료와 지난달 3일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결정 제122호’ 등 두 건입니다.

‘말씀자료’ 문건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핵실험 직후인 10월18일 김익현 군수동원총국장에게 `부족한 군량미는 남한에서 지원하는 식량으로 보충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 문건에서 김 위원장은 “보고된 자료를 보니 당에서 세운 목표의 83%를 확보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식량을 지원해줄 전망이 없지만 결국 남조선에서 식량이 들어오게 될 것이니 부족되는 식량은 쌀이 들어오면 더 보충하자”고 말했습니다.

‘말씀자료’와 함께 공개된 ‘비서국 결정문’에는 농업생산 실적을 허위작성하고 수확량을 개인 사취한 당 간부들을 징계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결정문은 “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 결과 많은 농업 부문 일군들이 농업생산 실적을 허위로 작성해 보고하였으며 개인 사취했다”며 “금년도 농업생산 실적 210만t을 350만t으로 허위 조작하여 인민경제 계획 수립에 혼란을 조성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문서에는 황해남도와 평안남도 도당 농업 비서 등 13명을 출당, 직위해제, 혁명화시키기로 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남성욱 교수는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이번 문건은 한국의 원조가 중단된 후 북한의 심각한 식량 부족 실태를 보여주며, 또 북한 정부가 담당 관료를 희생양으로 처벌함으로써 식량난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문건을 통해 북한 입장에서 식량 난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일단 군량미를 최우선적으로 보충해야 하는데, 남쪽에서 50만톤 중에서 10만톤만 왔기 때문에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담당 관료들을 희생양으로 처벌하려는 시도가 이번에도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 교수는 또 검열대상인 쌀, 옥수수, 감자 등 추곡 수확량이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8년 수확량의 60%를 밑도는 수준이어서 극심한 식량난과 제2의 고난의 행군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남한의 쌀 원조가 확실하게 재개될 것으로 보고, 이의 사용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그의 지적입니다.

남 교수는 평양을 출입하는 중국 인사가 노동당 고위 간부로부터 이번 문서를 입수했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평양을 자주 방문하는 중국 측 인사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고, 이 인사는 북한의 노동당 고위급 관료로부터 이 문서를 입수했습니다.”

한편 일부 한국 언론은 한국 통일부와 국정원이 해당 문서들을 확보해 검토 중이나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도한 가운데, 남 교수는 문건은 진본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진본임이 분명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김익현 군수동원국장의 나이나 식량통계 등인데, 이는 서울의 기준으로 볼때는 이상할 수 있지만 북한의 정확한 자료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국의 입장에서 문서의 진위에 대해서 문제삼는 것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내용을 기록해서 북한에서 빼오는 과정에서 토시 등이 틀렸을 수 있지만 진본임에는 분명합니다.”

3주에 걸쳐 다각도로 확인한 결과 문건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고, 따라서 교수의 권위를 걸고 공개를 결심했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한편 한국 정부의 대북 지원이 올해 처음으로 2천억원을  돌파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3일 발표에 따르면 지난1월부터 10월까지 북한에 대한 무상지원액은 2천108억원으로 잠정 집계됐습니다.

대북지원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이전인 1월부터 6월 사이에 집중됐으며, 35만t의 비료를 포함해서 모두 1천413억원 어치의 물자가 북한에 보내졌습니다. 하반기에는 대북 수해지원물자 등 695억원 어치의 지원이 이뤄졌습니다.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북한을 돕기 시작한 1995년 이후 지난 10월까지의 대북 지원액은 모두 1조1천718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