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2일은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아틀랜타 시에서 악명 높은 1906년 인종 폭동이 발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백인 남성 폭도들은 나흘 동안의 폭동 기간 중에 수 십 명의 흑인들을 살해했습니다.  당시 그같은 폭력 사태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후 대부분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1906년 아틀랜타 인종 폭동의 유산이 도시의 인종 관계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종 폭동 발생 10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아틀랜타의 한 단체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인종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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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랜타에서 100년 전 어느 따뜻한 토요일 저녁, 시내에 모인 약 5천 명의 백인 남성들이 흑인 남자와 소년, 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차에 타고 있던 흑인들을 끌어 내리고, 흑인 이발사들을 이발소에서 끌어냈습니다. 

올해 78살인 줄리아 돕스 버츠 씨는 아버지가 당시의 폭동에 관해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들이  뭔가 나쁜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는 버츠 씨는 시장과 주지사, 주지사에 출마한 사람들로부터 그같은 분노가 촉발됐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버츠 씨는 흑인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을 때  아버지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했다면서, 그것이 질투와 분노, 원한 같은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폭동의 원인은 분명치 않습니다. 1906년, 아틀랜타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도시였고, 새로운 남부의 경제적 수도였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를 폐지하는 헌법 개정이 이뤄진 지 50년 만에, 아틀랜타는 변화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틀랜타는 교육받고 부유하며 때론 독단적인 흑인들 사회의  중심이었고, 그들의 존재는 도시 내 많은 백인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조지아 주립대학교의 클리프 쿤 역사학 교수는 1906년 여름은 아틀랜타에서 인종간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같은 긴장은 1906년 9월22일에 중대한 고비를 맞이했습니다.

  쿤 교수는 토요일 오후와 저녁에 수 천명의 백인 남자들이 모였고, 그날 석간신문들은 흑인이 백인을 공격하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보도를 담은 호외를 발행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쿤 교수는 군중들 중 한 남자가 나무로 만든 비누 상자위에  올라서서 신문들 가운데 하나를 흔들면서 흑인들이 백인 여성들에게도 그같은 공격을 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냐고 사람들을 선동했다면서, 이후 백인 군중들은 시내 곳곳으로 흩어져 수 백명의 흑인 남성과 여성들을 공격했으며, 아틀랜타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진 대격전은 4시간 넘게 계속됐다고 덧붙였습니다.

폭력 사태는 나흘 동안 계속됐고, 적어도 24명의 흑인과 백인 2명이 사망했습니다. 유럽의 신문들은 아틀랜타 폭동을 러시아의 조직적 유태인 대학살에 비유했습니다.

폭동이 발생한 지 몇 주일 만에 적어도 천 명의 흑인들이 아틀랜타를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많은 흑인 사업체들은 시내를 떠났습니다. 흑인과 백인 사회 지도자들은 모임을 갖고 아틀랜타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방안을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틀랜타 인들은 흑인이나 백인 막론하고 각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1906년 아틀랜타 인종 폭동의 기억들은 빠르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조지아 주 공립학교 역사 시간에는 인종 충돌 사건을 가르치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전한 흑인들도 앞으로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의미만을 전달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아틀랜타 주민들은 입 밖에는 내지 않은 폭동의 기억이 도시의 인종간 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틀랜타 토박이로서 마틴 루터 킹 목사 국립 역사 사적지 홍보 담당관으로 일하는 수데이어 무아킬 씨는 그같이

우려할 만한 사건이 어떻게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면서, 또한 자신은 그것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무아킬 씨는 10년 전에야 폭동에 대해 알게 됐고, 그동안 잊혀졌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폭동 이야기가 묻힌 것은 그 사건이 인종적으로 진보적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무아킬 씨는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무아킬 씨는 당시의 사건에서 배워야만 할 교훈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1906년 당시에 아틀랜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교훈들을 배우고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무아킬 씨는 강조했습니다.

이제 아틀랜타 인종 폭동 100주년을 맞아, 아틀랜타의 민권 지도자와 역사학자, 교육자 등이 모여 폭동의 뿌리를 탐구하고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기록하는 한편, 아틀랜타에서 인종과 인종 관계에 관한 현대적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그 이야기를 이용하기 위한 연합체를 결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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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2nd marks the 100th anniversary of an infamous 1906 race riot in the southern U.S. city of Atlanta, Georgia. Mobs of white men killed dozens of African-Americans during the 4-day rampage. The violence received worldwide newspaper attention at the time, but has now been largely forgotten. Still, many believe the legacy of the 1906 Atlanta riots continues to influence race relations in the city. A group of Atlantans is preparing to mark the centennial and use the occasion to open a new dialogue on race.

It was a warm Saturday night when a crowd of about 5,000 white men gathered in Atlanta's downtown and began randomly attacking African-American men, boys and women, pulling them from trolley cars and dragging barbers from their shops. June Dobbs Butts, now 78 years old, remembers her father talking about the riot. "As a child I thought they must have done something very bad," she admits. "I could not think that this rage came from the mayor, the governor, people running for governor. So when we tried to find out what bad things did the black people do, he said, 'nothing.' Like if you are going to be punished, what did you do wrong? I couldn't believe it was jealousy, anger, venom, what else?"

A century later, it's still not certain what caused the riots.

In 1906, Atlanta was a rapidly growing city, and the economic capital of the new South. Just 50 years after the end of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abolishing slavery, Atlanta was a center of change. And it was home to a growing community of educated, affluent, and often-assertive African-Americans whose presence posed a threat to many whites within the city.

Cliff Kuhn, a professor of history at Georgia State University, says the summer of 1906 was a season of mounting racial tensions in Atlanta. Those tensions came to a head on September 22, 1906. "Thousands of men gathered that Saturday afternoon and early evening," Kuhn explains, adding that the afternoon newspapers had published 'extra editions' reporting new purported black on white assaults. "A guy gets up on a soapbox and waves one of these newspapers, saying, 'Are we going to let them do this to our women? Come on boys!' And the mob surges down Decatur Street. The mob scatters throughout the downtown area, attacking hundreds of black men and women -- a pitched battle in the heart of downtown Atlanta that lasts for over 4 hours."

The violence continued for 4 days, and in the end, at least two dozen blacks and two whites were dead. In Europe, newspaper reports compared the Atlanta riot to the anti-Jewish pogroms in Russia. In the weeks after the riot, at least 1,000 African-Americans moved from Atlanta, never to return. Many black businesses moved out of the downtown area. And although black and white community leaders held meetings to repair Atlanta's image, most Atlantans -- both black and white -- went about their business.

Memories of the 1906 Atlanta Race Riot seemed to fade quickly. It wasn't taught in Georgia history classes. Blacks who passed the story on to their children, did so as a cautionary tale. Others never discussed it.

But some Atlantans believe the unspoken memories of the riot have subtly influenced the city's race relations. "How is it that something so seemingly graphic and disturbing could have occurred in my home town, and I had no knowledge of it?" wonders Atlanta native Saudia Muwwakkil, a public information officer at the 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Historic Site. She first learned about the riot just 10 years ago and thinks she knows why it had been forgotten. "The story of the riot was buried because it would have inflicted serious damage on the city's image as racially progressive."

But Muwwakkil adds there are lessons to be learned. "As we look back to 1906, what happened in our city, in Atlanta, at that time, we look for opportunities to learn and apply those lessons to our lives today."

Now, on the centennial of the riot, a group of civic leaders, historians, genealogists, and educators has formed a coalition to explore the riot's roots, document what happened, and use the story as a way to open a contemporary dialogue about race and race relations in Atlanta.

The coalition has organized a new exhibit at the 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Site. Along with news clippings and magazine stories from the period, it features life-sized models of a trolley car and barbershop, like the ones from which the angry mob dragged African American victims.

June Dobbs Butts plans to visit the exhibit. She hopes to learn the truth about the riot because, as she observes, "Uncovering lies is always useful." She says that after 100 years, it is more than enough time to find the truth and discover unwritten legac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