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과정에서 납북된 남한 사람들 대부분이 전쟁 직후, 집이나 집 근처에서 3개월 간 집중적으로 끌려갔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남한 정부의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가 이뤄진 최초의 6.25 전쟁 납북자에 대한 실태분석으로 앞으로 납북자에 대한 정책과 사회적 인식 등, 변화도 예상됩니다. 자세한 소식 VOA 서울통신원 연결해 알아봅니다.

VOA : 6.25 전쟁 중에 납북된 사람 9만 6천 13명. 그러니까 이번 연구가 남한 정부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서울: 그렇습니다. (사)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산하에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한국전쟁 중 납북된 사람들에 대한 사료를 발굴하고 보관하는 별도의 기관-이 있는데요. 이 기관에서 국회도서관에서 발굴한 전쟁 당시 한국정부가 만든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강릉대학교 김명호 교수는 납북자 단체의 지속적인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납북되었다는 객관적 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보도를 접하고 객관적인 바탕자료를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연구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번 연구는 그동안 가족의 납북사실을 심정적으로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615 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입니다.

" (이미일,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 협의회)그동안에 구체적인 결과 논문. 이런 것이 없이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잡아갔다 이렇게 해 왔는데 그것이 논문자료로... 데이터로 나오니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지요."

 VOA: 그러니까 납북당시 정황을 통계화한 것이 ‘6.25전쟁 납북자 실태의 실증적 분석에 관한 연구’ 에 담긴 것이군요?

서울: 연구대상이 된 납북자 9만 6천 13명. 1950년 당시 남한의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와 역시 1952년 남한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 1954년 내무부 치안국이 작성한 ‘피랍치자 명부’ 등 5개의 명단을 대조해서 명단을 추려냈는데요. 이 같은 자료 역시 통일부 관계자로부터 자료 출처인 정부 문서의 신뢰성을 인정해 이 연구의 객관성에 대한 신뢰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료의 방대함만큼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정부가 직접 작성한 자료를 모아 중복자를 배제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도40명의 통계관련 학생이 한달반정도가 걸려서야 만들어 질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김명호, 강릉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그 명부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952년에 작성되어 있디 때문에요. 주소, 직업, 직급... 그것을 다 우리 한글로 바꿔서 엑셀(컴퓨터D/B프로그램)로 옮기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VOA: 전쟁 과정에서 납북된 남한 사람들.. 전쟁 일어난 뒤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납북되었다는 내용이 주목되는데요. 대부분이 집이나 집 근처에서 납북된 것으로 나타났다구요?

서울: 그렇습니다. 북한의 조직적인. 계획적인 납치 행위임을 드러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납북자 9만6천13명의 88.2%인 8만4천659명이 전쟁 직후인 1950년 7~9월에 납치됐고, 이들의 80% 가까이가 자신의 집(72.1%)이나 집 근처(8.2%)에서 납치된 것으로 나타나 조직적인 납치 행위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김명호, 강릉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북한군들이 납북자들의 개인별 인적 사항을 사전에 직접 알고 찾아와서 납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납치장소가 납북자들의 자택이 72.1%, 자택 근처가 82%, 그래서 약 80.3%가 납북자들이 자택이나 자택근처에서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북한의 의도적인 납치에 의해서 강제로 납북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VOA: 그러니까 누구를 납치할 것이라는 대상을 정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서울: 그렇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납치된 사람들의 직업적 분류를 통해서도 알 수 가 있는데요. 납북자 가운데는 젊은 농촌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농업 종사자가 61%인 5만8천373명으로 가장 많았구요. 인텔리에 속하는 공무원과 기술자, 교수와 교사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김명호, 강릉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국회의원이 63명, 판.검사 90명, 변호사 100명, 경찰 1613명, 행정공무원 2919명 ,군인 및 군속이 879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의사 및 약사가 526명, 소위 ‘인텔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직업군들이 많이 납치가 되었습니다. "

VOA: 납북자들의 연령대 분류를 보면 20, 30대 전문직 종사자와 기술자가 집중되어 있는 데요. 특히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에서 집중적인 납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네요.

서울: 그렇습니다. 전체 납북자 가운데 서울에서 납치된 인사는 4명 중 1명꼴인 2만2348명(23.3%)이나 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1949년 인구를 감안하면 서울의 납북자는 전체 인구의 1.5%였구요. 상대적으로 전라도(0.2%)와 경상도(0.15%)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명호 교수는 . “전쟁 초기 한강 다리가 끊어진 이유도 있지만 정치 사회 문화 중심지인 서울 한강 이북 지역에 남한사회의 인텔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납북자들은 10대부터 고령까지 또 여성과 남성 아이들을 가리지 않았는데요. 여성의 경우 납북당시 어린 영아들을 업고 납치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김명호, 강릉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연령층은 10대가 22.6%로 가장 많았구요. 20대가 53.6%, 30대가 15.4 %입니다. 그리고 10살 이하의 영아 및 어린아이 그 인원이 348명 특이 영아들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어머니와 함께 이북으로 납북된 것으로 판단되구요. 60대 이상의 고령자로 742명이 납북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VOA: 북한이 일정한 시기에 대대적으로 남한의 인텔리 계층을 납치한 이유도 분석하고 있지요?

서울: 그렇습니다. 북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활용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선택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625 전쟁 납북자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은 당시 북한은 개인 재산을 전부 몰수한 데다 지주계급과 종교계 인사를 비롯해 전문직 인텔리 계층의 상당수를 숙청했기 때문에 북한에 거주하던 지식인 상당수가 남한으로 피신했고 북한 사회에는 인텔리 계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면서 당시 북한 입장에선 대학을 세우고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교수를 할 사람도 법을 전공한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아 전쟁 뒤 북한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남한의 인텔리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강조했습니다. 625 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관계자는 이번 연구 결과가 납북자에 대해 월북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회일각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고 김명호 교수는 정부의 정책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김명호, 강릉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이제 남한 정부는 과거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실시되었던 납북자들의 명예를 복원시키고 유가족들의 바람인 납북자들의 생사확인 앞장서서 밝혀줘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정부는 그동안 미진했던 납북자 문제를 보다 적극적이고 성의있는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

서울: 한편 강릉대 김명호 교수는 1840명의 여성의 납치에 대한 연구분석은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하고 당시 여성 인력의 납북에 대한 정밀분석을 덧붙여 전체 6.25 전쟁당시 납북자들에 대한 자료를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