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에 한국에 입국한 김옥선(59세) 씨는 12월에 열렸던 ‘북한인권에세이 공모전’에서 입상을 하였습니다. 이 공모전은 지난 주 서울에서 열렸던 <북한인권국제대회>가 주최한 것입니다.

김옥선 씨의 수기 제목은 ‘핑크빛 사과’입니다. 핑크빛 사과에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 김옥선 씨를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김옥선 씨 집에는 일주일에 2번씩 손녀인 이하나양(가명, 3세)이 찾아옵니다. 김 씨는 두만강을 건널 때나 한국에 오기 위해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었던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용케 견뎌준 손녀가 대견해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귀엽고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김옥선 씨는 손녀가 올 때마다 매번 밥 때문에 실랑이를 벌입니다. 밥보다 과일을 더 좋아하는 하나 양은 “밥 먹자”는 할머니의 독촉에 “싫어 난 오렌지”라며 냉장고로 쪼르르 달려가곤 합니다. 그런데 오렌지도 금방 싫증이 나는지 매번 빼 먹지 않고 ‘핑크빛 사과’를 찾습니다. 핑크색을 몰랐던 김옥선 씨는 딸을 통해 손녀가 찾는 사과가 빨간 사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득 김옥선 씨는 북한에서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고 합니다. 한창 식량난이 심했던 90년대 중반 큰 아들이 영양실조로 죽고 딸마저 파라티프스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미음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일주일간 고열 속에 시달렸던 딸은 사과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과 한 알을 사면 온 식구가 다 굶어야 했기에 김옥선 씨는 딸에게 사과를 먹일 수 없었습니다.

“딸이 그렇게 고열속에서 신음할 때 사과를 딱 먹고 싶다고 그러드라구요. 사과 물을 좀 짜서 먹었으면. 근데 그때 당시 내가 사과를 사줄 형편이 못됐어요. 사과 하나를 사주면 온 식구가 다 굶어야 되니까.” 김옥선 씨는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막 고통스러워 하는데 어떻게 대책이 없고 병원에 입원하자고 하니까 병원 선생님이 입원해도 약은 본인들이 가져와야 되고 음식도 본인들이 가져와야 되고 병원에 침대도 없다. 복도까지 다 환자들이 누워있다. 이러니까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게더라구요. 그러니까 정말 에미로서 자식을 내가 손에다 옆파리에 놓고 죽이지 않는가 이런 생각 들드라구요.”

당시 북한에서는 파라티푸스에 걸리면 북한 돈 만원이 있어야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00원도 벌기 힘든 김옥선 씨에게 만원이라는 돈은 하늘과 같은 돈이었습니다. 김옥선 씨는 고열에 신음하는 딸의 모습을 애타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 자체가 열이 고열이 체온계 눈금이 42도까지 있는데 그 눈금이 더 없어서 못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다 목안이 타고 입술이 다 말라 터지고 기본 미음도 넘기지 못했어요.” 그나마 딸 곁에서 간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장사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난 또 나가서 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앉아서 팔아야 생계를 유지하겠는데 아이를 붙잡고 있을 수 없고 아침에 갈 때는 수건에 찬물에 적셔가지고 입안에다 물어줘요. 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들게.” 하루는 장마당에서 딸 생각에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왜 자꾸 우느냐”고 물어왔다고 합니다.

김옥선 씨가 딸 이야기를 꺼내자 그 아주머니는 “나도 그 병에 걸렸지만 민간요법으로 고쳤다”며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김옥선 씨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녹두 한 홉과 오징어 세 마리를 사서 푹 끊인 후 딸에게 그 물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딸은 피를 토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이가 코피를 터지면서 코피가 터지다 못해 마지막에는 목구멍으로 선지피가 막 나오는 거예요. 이불을 다 적시면서. 그러던 게 딱 열이 그 다음부터 떨어지는 거예요. 일주일간 고열 속에서 헤맸는데, 열이 떨어지니까 이젠 살았겠다. 살 수 있구나 이런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 그 후유증으로 양쪽 귀가 딱 메인 거예요. 하나도 듣지 못해요. 그래서 내가 딸을 붙잡고 막 통곡하던 생각이 나고.”

당시 딸은 영양실조로 생리도 끊기고 가슴도 다 말라붙어 있는 상태였고 귀까지 그렇게 되자 김옥선 씨는 “시집도 가지 못하겠다”며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나 탈북해 중국에 나와서 한달 만에 딸은 귀도 트이고 보통 처녀들처럼 몸을 회복했습니다. 김옥선 씨는 약을 쓴 것도 아니고 밥을 잘 먹이고 나니 몸이 회복되었다며 그때 영양실조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다고 합니다.

또한 김옥선 씨는 중국에서 북한 정권의 선전이 허위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때 김일성이가 뭐이라고 하던가. 당 대회 때 우리 백성들을 이밥에 기와집에 비단옷을 입히겠다 이랬는데 뭐 중국에 넘어와 보니까 그 나라 대통령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다 그렇게 이밥 생활을 하고 정말 고기를 싫어서 안 먹고 이러는데 우리 북한에서는 정말 뗄 게 없어서 먹을 게 없으니까 뗄 것도 없지요. 뗄 게 없어서 고생하던 고생고생 겨울에도 이 추운 겨울에도 불 떼지 못해서 온 식구가 다 옷을 입고 양말까지 신고 이불속에서 떨던 생각 그런 생각도 나고.” 특히 김옥선 씨는 한국은 북한에 비하면 지상천국이라며 아직도 북한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는 둘째 아들을 떠올렸습니다.

 “여기 한국하고 북한 생활을 대비하면 실지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맨날 인민들을 위한 정치라고 광폭정치라고 이렇게 하는데 실지 백성들한테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 여기 와서 보니까 이 사회는 정말 온갖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해서 생겨나고 법도 인간을 위해서 존중을 하고 그 다음에 물건 하나 만들어서도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 경쟁하면서 그런 물건들이. 정말 이런 데가 지상천국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많이 해봤어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