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탈북자들을 위한 사단법인 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중국에서 숨어살고 있는 한 탈북 여성으로 부터 이메일로 접수한 편지내용을, 이 단체, 권은경 사무차장으로 부터 자세히 들어봅니다.  보도에 서울에 있는 [최윤희]탈북자통신원입니다.

이춘애(가명)씨가 보내온 편지를 최근 홈페이지에 공개했습니다. 99년 1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는 이씨의 편지에는 90년대 중반 식량난 시기를 고통스럽게 견뎌야 했던 한 가족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운동본부 권은경 사무차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운동본부는 올해 5월경 이춘애 씨의 편지를 입수했습니다. 안전문제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는 자세한 소개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권 차장도 이씨의 구체적인 신상 정보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 의하면 한 30대 이상은 되었고요 그리고 현재 중국 천진(天津) 근처에서 생활을 하는 걸로 근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런 내용들은 저희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춘애 씨 신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편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씨가 4형제 중 맏이라는 것과 부모님이 있었다는 것,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학송’역에서 기차를 탔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고향은 함경북도 은덕군으로 추정됩니다.

권은경 차장과 함께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춘애 씨는 “하루하루 끼니 걱정만 해도 힘드실 어머니가 걱정되어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씨는 아버지가 다니는 탄광에 나가게 됐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살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90년대 중후반에 워낙 살기가 힘드니까, 제대로 생활을 하기가 힘드셨고요 그리고 가정 형편이 힘드니까 아버지가 일하시는 탄광에서 이분도 같이 일을 하셨다고 그러대요. 그것도 10대 때, 17살 나이에 탄광에서 콘베아 운전을 했다고 그러네요.”

이춘애 씨는 수십리 길이나 되는 막장에서 10시간 이상씩 죽도로 일했지만 배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배급을 기대할 수 없었던 이씨의 어머니는 가족들은 굶기지 않기 위해 “손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신의주에서 머리카락과 밀가루를 바꾸어 준다는 소문”을 듣고 이씨와 어머니, 셋째 동생은 머리카락을 구해 신의주로 길을 잡았습니다. 은덕군에 살았던 탈북자 김옥희 씨에 따르면 함경북도에 “신의주에서 머리카락을 밀가루로 바꿔준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장만해 신의주까지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의주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열악한 전기 사정으로 열차가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어쩌다 기차가 한번 지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밀려들어” 왔습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비좁은 기차에 간신히 올라탄 이씨 가족들은 창문하나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기차를 타고, 3일 밤을 세워 신의주행 기차를 탈 수 있는 평양 간리역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씨는 그곳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을 목격했습니다.

 “역마다 꽃제비들이 거의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하면서, 역마다 사람들이 그냥 밤도 지내고, 잠도 자고, 또 훔쳐서 뭘 먹기도 하고 주워 먹기도 하고 그렇게 다들 지내는 모습들을 봤다고 하거든요.”

역전에는 꽃제비 뿐만 아니라 집이 없어 온 가족이 역전 안에서 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배가고프면 역전에 머물고 있는 장사꾼들의 봇짐을 훔치곤 했습니다. 이춘애 씨는 당시 정황을 “차마 상상도 못할 날치기 판”이라고 편지에 적고 있습니다.

신의주에서 밀가루를 구해온 이씨 가족들은 함흥에서 밀가루가 비싸다는 소문을 듣고 시장에 나갔다가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이씨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앓게 됩니다. 정신적 충격과 여독이 겹친 탓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합쳐져서 아파 화병 비슷하게 몸이 아프시기 시작하셨나 봐요. 그러면서 계속 시름시름 아프셨고 근데 뭐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워낙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제대로 간호도 못 해드리고 그냥 어머니가 앓는 것만 계속 바라보고만 지냈던 것 같애요.”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어머니에게 약 한 첩 써보지 못했던 이춘애 씨는 1997년 5월 10일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든 이씨 형제들에겐 슬픔도 사치였습니다.

 “기댈 곳은 스스로, 4형제 밖에 없으니까 제일 맏이인 이 여성분이 어디서 석탄을 구해오면 동생들은 장마당에 나가서 석탄을 팔고 나무를 해오면 나물을 내다 팔고 그런 식으로 겨우 연명을 하면서 탈북하기 전까지 생활을 하셨대요.”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이춘애씨, 그녀는 편지에서나마 “어머니”를 간절하게 외쳤다고 합니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파도 약 한 첩 써보지 못하셨던 어머니. 추운 겨울 눈보라 휘몰아쳐도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보지 못하고 그냥 길에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나의 어머니. 단 한번만, 1분만이라도 눈을 뜨시고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맛있는 것이 생기면 자그마한 것이라도 우리 자식들을 먼저 생각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그토록 애쓰며 살아오신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 3글자가 나의 가슴을 찢어 놓는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