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 윌리암 랜퀴스트 대법원장 장례식이 오늘 7일 오후 이곳 워싱턴근교, 알링톤 국립묘지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가운데 거행됐습니다.  

랜퀴스트 대법원장의 일반 애도객들을 위한 추도절차는 6일 워싱턴에 있는 대법원건물안, 대회당에 유해가 안치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쉬 대통령은 6일 미국 성조기로 덮힌 관옆에서 묵념을 올렸습니다. 

랜퀴스트 대법원장은 1972년 대법원판사로  임명된지 14년만인 1986년에 대법원장으로 승격 임명되었고, 지난 3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 했습니다.

고 랜퀴스트 대법원장의 생전의 법조계 업적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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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헙스 렌키스트는 1924년 중서부 위스컨신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공화당 지도자들에 대한 부모의 존경심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렌키스트는 어릴때부터 이례적으로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공립 학교 담임 선생에게 자기의 평생 계획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10대 소년이었던 렌키스트는 지역 민방위대 장교로 자원 봉사했고, 그후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과 하바드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1953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렌키스트는 과 수석 졸업생이었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유능한 토론가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같은 해, 렌키스트씨는, 대법관으로 뉴렘버그 나치 전범 재판소의 수석 검사직을 맡고있던 로버트 잭슨 판사의 법률 서기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18개월의 서기직을 끝내고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연방 법무부의 검찰 차장으로 봉직했고 공화당 정치에 갈수록 더 적극 개입하게 됐습니다. 1972년 나이 47세에 렌키스트는 리차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됐습니다.

대법원에서 십여건의 재판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톰 골드스타인 변호사는,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대법원의 보수적인 혁명을 일군 인물로 역사는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드스타인씨는, 렌키스트 대법관이 30년 전 “주의 권리와 소수 인종이나 여성에 대한 적극 고용법, 그리고 교회와 국가간의 균형에 관해 내놓은 의견으로 영향력을 쌓기 시작했다고 지적합니다. 대법원 전문가인 골드스타인씨는, 렌키스트 대법관이 이들 재판에서 흔히 혼자 고군 분투하곤했으나, 결국 그의 보수적인 견해가 다수에 의해 공유됐다고 말합니다.

“렌키스트 대법원장의 개척자적인 견해들은 그가 새로운 대법관이었던 1970년대에 나왔고, 심지어1980년대 초엔, 그가 가장 강력히 신봉했고, 당시 대법원이 상당히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이단적인 입장에 올려놓곤 했던 견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견해들이 모두가 확립된 것은 아니었으나, 많은 경우 그의 소수 의견과 입장은 다수 의견으로 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골드스타인씨는 또한, “미국에서 보수적인 법적 사고가 대두되고 성장하도록 만든 장본인은 렌키스트라고 말하고,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며, 위대한 대법원장의 한사람으로 기억될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연방 법원을 대단히 훌륭히 이끌었다”고 골드스타인씨는 말하고,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에 관한 법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 방식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것이 그 정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렌키스트씨는 자신의 관점대로 대법원을 늘 설득하진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법관시절, 그는 낙태를 합법화시킨 1973년의 획기적인 “로이 대 웨이드” 판결에서 소수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으로 재직시 대법원에 상고된 여러 건의 재판에서 대법원은 여성의 선택권에 계속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렌키스트 대법관은 1986년에 로날드 레간 대통령에 의해 미국의 제 16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대법원장으로서 그는, 권한을 연방 정부로부터 주로 이전하는데 도움을 준 “근소한 다수 의견”을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그 가장 획기적인 판결은, 지난 1995년, 학교 부근에서 총기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한 연방 법은 그러한 행위에 대한 통제 권한이 국회가 아니라 주에 있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시한 것입니다.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또한 학생들이 나라 돈으로 종교적인 교육 기관에 다니는 것을 허용한 “스쿨 바우처”제도를 지지했습니다.

1988년,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특별 검사제 신설을 지지했는데, 이 특별 검사제가 결국 윌리암 제퍼슨 클린턴 대통령을 조사하는데 동원됐던 것입니다.

11년 뒤인 1999년,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상원의 탄핵 재판을 주재하는 이례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지난 2000년 논쟁을 불러일으킨 미국 대통령 선거 후,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남부 플로리다주에서 두번째 검표를 해야하느냐의 여부를 판결하도록 요청된 “부쉬 대 고어의  사건”에서 대법원의 청문회를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이 청문회에서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재 개표는 저지돼야 한다는 당시 텍사스 주지사였던 조지 부쉬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이는 실상, 이 대통령 선거 결과를 최종 판가름한 것으로 조지 부쉬 후보를 제 43대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대법원 역사에 관한 여러 책을 저술한 노련한 역사 학도였습니다.  그의 지도력하에, 대법원은 효율적으로 운영됐고 이전의 역대 대법원장 시절보다 문제가 덜 생겼습니다.

지난 1976년 렌키스트 대법관 밑에서 일한 바있는 돈 아이어씨에 따르면, 그가 직원들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으나 격식이나 의식은 전혀 없었으며, 대중에게 비친 그의 보수적인 이미지 때문에 전혀 다른 한 남자의 모습이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재판 종결시,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상원에서의 재판을 주재하는 것과 대법원에서의 재판을 주재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반영했습니다.

 “나는, 대법원이란 매우 구조적인 환경으로부터 상원이라는 보다 자유로운 환경으로 이동할 때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슬픈 남자가 아니라 보다 현명한 자를 남겨둡니다.”

그러나, 렌키스트 대법원장이 직책 수행에 얼마나 진지했는 가는 그의 다음과 유명한 발언에서 엿볼수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들 피고들에게 내린 판결의 기록이, 내일, 역사가 우리를 판단할 기록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해 가을 갑상선 암 진단을 받은 뒤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얼마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올 1월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지팡이를 짚고 조지 부쉬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을 주재했습니다.

   렌키스트 대법원장은 올 봄 다시 대법원으로 돌아와, 법적 소견을 작성하고 구두 논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