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는 1825년 3월 4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취임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행정부의 모든 관리, 상 하 의원, 대법관, 물러나는 제임스 몬로 대통령등이 참석했습니다. 아담스는 참석자들에게 단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취임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헌법과 대의 정치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자유롭고 강력해졌습니다. 미국은 북 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대륙을 건너 태평양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10년동안 정치 세력간의 갈등은 완화됐다고 아담스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진정한 국가를 만들기위해 국민들은 서로의 차이를 접어두고 단결할 때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아담스는 자신이 소수 세력의 대통령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닥아올 여러 해 동안 모든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의 제 6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했습니다.

죤 퀸시 아담스는 국가에 봉사하도록 길러진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제 2대 대통령인 그의 부친 죤 아담스와 그의 모친 애비게일은 그가 좋은 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죤 퀸시 아담스의 정치 생애에는 세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중 대통령으로서의 생애는 가장 짧은 것이었습니다. 약 25년전부터 아담스는 대부분의 임명직 관료로 일을 해왔습니다. 그는 네델란드, 독일, 러시아, 영국등에서 미국 대사로 일했습니다. 그는 1812년에 끝난 영미 전쟁의 수석 협상 대표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는 8년동안을 국무장관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다음 4년 동안이 대통령으로 보낸 시기였습니다. 그뒤 하원의원으로 17년을 보냈습니다.

국무장관으로 있는 동안 그는 두가지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른바 몬로 독트린을 수행한 것은 아담스였습니다. 이 정책에서 몬로 대통령은 어떤 유럽 국가도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 건설을 추진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몬로 대통령은 그같은 움직임은 미국의 평화와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규정했었습니다. 아담스의 다른 성공은 스페인과 체결한 대륙협정(TRANSCONTINENTAL TREATY)이었습니다. 이 협정에서 스페인은 훌로리다가 미국 통치하에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스페인은 또 미국의 서부 개척 경계선에도 합의했습니다. 이 경계선은 멕시코만에서 로키산맥( ROCKY MOUNTAINS) 까지연결되는 광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경계선에서부터 현재의 오레곤(OREGON)과 캘리포니아(CALIFORNIA)가 연결됐습니다.

죤 퀸시 아담스는 정치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대신 그는 정적들과 국가의 서로 다른 지역들을 내각에 합류시키도록 애썼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그러나 내각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남부의 인사들이 내각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남부의 진정한 지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아담스 정부의 다른 인사들은 그가 거부하는데도 정치권력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중 한사람이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출신 부통령 죤 칼훈(JOHN C. CALHOUN)이었습니다. 그는 아담스의 내각 인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아담스는 칼훈의 생각을 수용하기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각료를 임명했습니다.

전 버지니아주 지사이며 상원의원인 제임스 바버( JAMES BARBOUR)는 전쟁장관이 됐습니다. 펜실바니아의 리챠드 러쉬(RICHARD RUSH)는 재무장관에 기용됐습니다. 메릴랜드의 윌리암 워트(WILLIAM WIRT)는 법무장관에 유임됐습니다. 아담스는 각기 다른 지역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기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담스는 의회에 보낸 첫 멧세지에서 중앙 정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습니다. 정부의 기본 목적은 국민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도로와 운하 건설 공사를 추진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립 대학교와 국립 과학 센터를 설립할것도 제의했습니다. 아담스는 의회가 국가의 경제를 위한 법을 제정하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법도 만들어야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부와 남부의 많은 사람들은 헌법이 정부에게 이 모든 일을 할수있는 권한을 준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이같은 권한은 각 주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회에 들어간 이들 주의 의원들은 아담스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미국의 정치 상황은 죤 퀸시 아담스에 들어와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826년 선거에서 그의 반대 세력은 상원과 하원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민주당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그 다음 대통령 선거때인 1828년에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장군을 지지했습니다.

아담스 재임중의 중요한 한가지 입법 조치는 수입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서부의 여러 주들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공업제품에 세금을 부과하기 바랐습니다. 목적은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부의 주들은 수입관세를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보호할 필요가 있는 공업생산품을 만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따라서 중앙 정부가 그같은 세금을 승인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주당은 앤드류 잭슨을 당선시키기 위해서는 서부와 남부의 지지를 필요로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서부를 돕게 될 것으로 보이는 법안을 상정했습니다. 민주당원들은 서부가 자신들을 도와주려 한 민주당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동북부의 여러 의원들은 서부와 동조해 관세법을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동북부의 산업이 피해를 볼 위험이 있는데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보호무역 세금 제도에 대한 생각이 소멸되는 것을 막자는데 있었습니다. 이 법안은 상하원을 모두 통과했습니다.

이는 아담스 대통령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법안에 서명을 해야 할 것인가 반대를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서명을 하면, 헌법이 보호 무역을 허용하는 것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는 남부로부터의 지지를 더욱 떨어지게 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거부를 하면 서부와 동북부로부터의 지지를 상실할 것입니다. 아담스는 결국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의회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의회내에서 민주당은 아담스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또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예를들면 이들은 아담스가 정부 자금을 잘못 사용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아담스와 그의 부친이 정부 일을 하는 동안 부를 늘렸음을 보여주려 애썼습니다. 또 다른 의원들은 아담스가 자기를 지지한 사람들에게 요직을 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사실과 달랐습니다.

최고위 행정부 관리들은 아담스 대통령에게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에게만 자리를 주라고 촉구했습니다. 아담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정부 관리는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4년 재임중 정부 요직에서 그가 해임한 사람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해임된 사람들은 일을 잘못했거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었습니다. 아담스는 정치적으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요직을 맡겼습니다. 그는 정치적 이유에서 직책을 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담스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많은애를 썼던 여러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연적으로 이들의 지지도는 식어갔습니다.

아담스의 공화당과 잭슨의 민주당은 극심한 갈등을 나타냈습니다. 가장 심한 싸움은 언론에서 나타났습니다. 양측은 각각 자신들을 지지하는 언론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데일리 내쇼날 저널(DAILY NATIONAL JOURNAL)은 행정부를 지지했습니다. 합중국 텔레그라프(UNITED STATES TELEGRAPH)는 앤드류 잭슨을 지지했습니다.

행정부 지지 신문은 처음에는 국가적 단결과 개인 정치를 탈피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신문은 태도를 달리했습니다. 이 신문은 공화당내의 정치적 잘못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습니다. 이 신문은 그같은 문제로부터 독자들이 관심을 돌리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 신문은 과거의 선거운동중 앤드류 잭슨에 반대했던 팜플렛을 찍어냈습니다. 이 팜플렛은 잭슨이 여러가지 잘못된 면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중 가장 피해를 준것은 그가 남의 아내를 가로챘다는 것이었습니다.